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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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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4-04-22 09:09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머리가 허연 사내 하나가 털이 하얀 강아지 한 마리와 동네 골목을 산책 중이다.
산책하고 싶어 한 게 개였는지 사내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강아지가 앞장서고 사내가 뒤를 따른다. 강아지가 길모퉁이에 멈춰 서 있다. 아랫도리를 낮추고 볼일을 보는 개를 사내가 조용히 기다려준다. 꽁초 한 개비 마음 놓고 못 버리는 인간의 거리에 천연덕스럽게 응가를? 무슨 상관이냐고, 갈 길이나 가시라고, 녀석이 흘끔 위 아래로 훑는다. 녀석이 일어선다. 사내의 손이 점퍼 주머니 안에서 꼼지락거리더니 둘둘 말린 휴지와 꾸깃꾸깃한 비닐이 딸려 나온다. 바닥에 널린 똥 덩어리를 허리 굽혀 주워드는 충씰한 저 사내, 자기 아이들 기저귀 수발도 저리 극진하였을까.

  아이 둘을 키워내는 동안 기저귀 한 번 봐준 적 없는 남자가 어느 날 저녁 코웃음을 치며 들어왔다. 고교 동창 몇이서 술 한 잔을 하는데 옆자리 친구에게 자꾸만 전화가 빗발치더라는 것이다. 눈치를 보니 빨리 들어오라 채근하는 전화 같아 신혼도 아닌데 다 늙어 무슨? 하니 난감한 표정의 그 친구 왈, 그날이 견공(犬公) 제삿날이라는 거였다. 13년 동안 한 식구로 살던 개가 지난 해 노환으로 돌아가셨는데 아이들과 추모 행사를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 참 기가 막혀… 선산 벌초도 안 다니는 녀석이…”
개 영정 앞에 촛불 켜 놓고 추도 예배를 드린다는 말에 나 또한 함께 웃어버리고 말았지만 애견 유치원에 애견 카페, 애견 호텔까지 성업 중인 우리 동네 개들이 들으면 세상 변한 거 모르냐고 코웃음을 칠지 모른다. 화려한 액세서리에 다이어트 사료는 기본이고 때 맞추어 스케일링을 하고 관절 영양제까지 복용한다는 아랫집 귀부인 말티즈 여사가 건너편 빌라에 사는 숏 다리 노신사 닥스훈트 공(公)을 만나면 콧 속 말로 킁킁 속닥 거릴 것이다. ‘케이블에 도그 TV 생긴 거 알아요? 혼자 있을 때 시간 죽이기 딱이더라고. 인간들이 이제야 좀 철이 드는 것 같아요.’

  인간이 오늘날 이 행성의 패권을 장악하고 우두머리의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된 데에는 초창기 개들의 혁혁한 공헌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맹수를 앞지르기 시작한 것은 개와 편 먹은 다음 부터였으니까. 야생 늑대에서 길들여진 개들이 인간의 편에 서서 사냥감을 쫒고 사나운 짐승들을 영역 밖으로 축출하는 데에 일조해주지 않았다면 지구촌의 권력 구조는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고 개새끼니 개떡이니 개망나니 같은 말로 시시 때때 자존감을 뭉개고, 복 날 마다 개장국으로 함포고복(含哺鼓腹)하는 인간들이야말로 개 쪽에서 보면 천하에 배은망덕한 파렴치한들 아닐까. 개가 그런 욕을 들어야 한다면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 왕좌를 빼앗긴 호랑이나 사자, 질투심에 사로잡힌 여타 가축들에게서 일 텐데 말이다.

  인간과 짐승 사이에서 캐스팅 보트를 인간 쪽에 행사함으로써 뭇 짐승들에게 추악한 배신자로 낙인 찍힌 개들에게도 반역의 열매는 향기롭고 달았다. 인간과 함께 노루나 사슴을 쫒음으로써 사냥감이 아닌 사냥 조교로 신변 안전을 보장 받았고 시시 때때 떨어지는 떡고물로 끼니 걱정을 면하게 되었다. 타고난 명민함으로 사냥꾼이 아닌 사냥꾼의 마누라가 실세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해낸 그들은 안방 마님 품 안에 쏘옥 안길 수 있게 체구를 줄이고 품종을 다변화 함으로써 오늘날 야생 늑대의 개체 수를 현격하게 뛰어넘을 만치 종족 번식에도 성공하였다. 뿐인가. 금세 헤어졌다 다시 만나도 십 년이나 못 본 듯 열광적으로 뛰어오르는 호들갑 매너 덕에 인간의 침소에서 껌을 씹고 유기농 간식을 깨작거리는 특권과 호사를 누리게 되었으니 선견(先犬))들의 밝은 선견(先見)이야말로 종족의 운명을 바꾼 건곤일척의 결단이었던 셈이다.

  이쯤에서 이제 적인 듯 동지인 듯 아리송한 이웃 사촌 고양이 이야기도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고양이는 어떻게 우리 곁에 왔을까. 불공 대천의 ‘개새끼’들 때문에 제왕의 자리를 잃어버린 맹수들, 당장 마을로 쳐 내려가 원수와 배신자를 요절내고 싶었으나 전세가 턱없이 기울어버렸다. 절치부심 복수 만을 꿈꾸다가 졸개 몇을 내려 보내 염탐이라도 해보자 했던 바, 호기심 많고 예민한 동아시아 출신의 삵과 날렵하고 유연한 이집트 원산의 야생 고양이가 최종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 동그란 눈망울에 조신한 걸음걸이, 섹시한 목소리를 가진 고양이가 인간의 경계심을 늦추고 개와 맞장을 뜰 만하다 하여 밀사로 발탁 되었다던가. 믿거나 말거나, 유치하거나 말거나다.

  인간 세상에 잠입한 고양이는 주어진 소명을 잊지 않았다. 인간과 개에게 공히 반감을 품고 누구에게도 함부로 곁을 주지 않았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반의 반 길 고양이 속은 알다 가도 모르는 일. 잃어버린 종족의 영화를 꿈꾸며 복수 혈전을 획책하는 그들은 비굴하게 꼬리를 흔들어 먹이를 탐하지 않는다. 함부로 무릎을 낮춰 복종을 맹세하지도 않는다. 타고난 ‘밀땅’의 고수답게 새침한 듯 까칠한 듯 내숭을 떨며 길 들지 않는 야성으로, 맹수의 품위로 어슬렁거린다. 고양이는 채권자처럼, 개는 채무자처럼 우리 곁을 맴돈다. 인간에 대한 개와 고양이의 입장 차이를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의 책 <상상력사전>에서 이렇게 통찰한다.
- 개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나를 먹여줘. 그러니까 그는 나의 신이야.’ 고양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나를 먹여줘. 그러니까 나는 그의 신이야.’

  한결같은 충성심과 애교로, 요염하고 도도한 변덕으로, 인간의 마음을 훔치는 동물들. 애완을 넘어 반려로, 진즉 품계가 격상된 그들은 제각기 다른 매력과 전략으로 인간을 수하로 부리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저들은 아득한 시절의 구원(舊怨)을 잊고 적의 적은 동지요 우방이라는 심정으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에 엿 먹일 계책을 암암리에 주고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털도 없고 꼬리도 없는 저 수상한 반려 아닌 반려가 요즘엔 하나같이 애정 결핍과 외로움 같은 치명적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는 일급 비밀마저 저들에겐 한물 간 정보일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특히나 인간 남자들은, 이 시대적 패러다임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이 이미 바뀌었다는 사실을. 사람 사는 세상에도 개과와 고양잇과, 두 부류의 여자가 존재하며 둘 다 공히,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갑(甲)질로 사내들을 부려 먹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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