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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쿤(cancun)에서의 작은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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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3-09-01 09:44

이현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막내딸이 지난 5월 멕시코 칸쿤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렸다. 5월의 신부가 되었다. 양가 직계 가족과 신랑, 신부 친구들 각 3쌍씩만 초대한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신랑, 신부 친구들은 7박 8일간의 모든 경비를 자비로 부담했다. 따로 청첩장도 만들지 않았고 축의금도 일체 사양했다. 반강제로 주시는 분들만 어쩔 수 없이 받았다.

칸쿤 공항에 도착하니 수십 명의 제복 입은 직원들이 일렬로 도열해서 우리를 영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택시 기사들이었다. 호텔을 예약한 사람들은 호텔 측에서 제공하는 차량이 따로 있는데 이들이 가끔 호텔기사를 사칭해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결혼장소인 파이니스트(Finest) 호텔은 공항에서 40분 거리였다. 호텔까지 가는 거리 모습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밴쿠버의 헤스팅 가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호텔에 도착해서 3개의 게이트를 통과했다. 각 게이트마다 검문이 삼엄했다. 외부인은 일체 출입이 안 되고 부대시설 이용도 할 수 없는 구조이다.

정문에서는 안내직원이 시원한 음료수를 쟁반에 받쳐 든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접수를 마치고 예약한 방으로 이동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습도가 높아 뜨거운 물수건으로 온몸을 감싸는 듯한 느낌이다. 3층 방에 도착해 발코니로 나가보니 그림과 같은 오션 뷰가 펼쳐져 있다. 흰 구름이 없으면 하늘과 바다의 구분이 모호하다. 일 층에는 베란다에 딸린 전용 풀장이 하나씩 있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이 이용하면 좋을 듯했다.

대강 짐을 정리하고 호텔 투어에 나섰다. 파이니스트는 400개가 넘는 객실과 13개의 레스토랑, 12개의 바, 야외 결혼식장 및 리셉션장을 갖춘 5성급 대형 호텔이다. 막내가 사용할 야외 결혼식장과 피로연 장소를 점검하고 피로연 후 캠프파이어가 펼쳐질 백사장을 살펴본 다음 뷔페식당으로 향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일식, 스테이크, 해산물 등의 식당이 혼재해 있어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모두 공짜다. 팁만 주면 된다. 우리는 미화 1불짜리를 100장 정도 준비했다. 음료수와 술도 무제한으로 제공해 준다. 주당들에겐 그야말로 천국이다. 밖에 나가기 싫으면 룸서비스를 24시간 이용할 수도 있다.

사흘 후 결혼식을 백사장 근처에 설치된 야외결혼식장에서 진행했다. 앞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사방이 탁 트였으며 지붕도 있었지만 30도가 넘는 더위에 양복과 넥타이를 매니 숨이 턱턱 막힌다. 30여 년을 고이 기른 막내와 팔짱을 끼고 입장해 신랑에게 ‘잘 부탁해!’라고 말하며 신부의 손을 넘겨주었다. 수많은 세월 동안 막내와 공유한 갖가지 추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호텔 전속 주례가 진행을 맡고 멕시코에서 미리 섭외한 사진사가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한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피로연 장소로 이동했다. 푸른 바다와 하얀 백사장, 방갈로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멋진 곳이었다. 신랑, 신부의 감사 인사와 친구들의 축하 메시지를 들은 다음 신부 아버지의 자격으로 두 사람에게 짧은 덕담을 했다. 신랑, 신부 친구들 중 외국인이 몇 명 섞여 있어 영어로 첫마디를 떼었다.

“레디스 앤 제널먼! 웰컴 투 캔쿤……제 영어는 여기까지입니다. 30년 전 유럽 여행을 갔을 때 가이드가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가야지 다리가 떨릴 때 가면 안 됩니다’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멀리 칸쿤까지 와준 친구들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제 딸이 빨리 결혼을 못할 줄 알았습니다. 워낙 잘생긴(?) 아빠를 둔 덕에 눈이 높아져서 웬만한 남자는 눈에 차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멋진 신랑을 맞이하여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백세시대가 도래한 요즘 두 사람은 아마도 7-80년 이상을 같은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장구한 세월을 함께하려면 배우자에 대한 신뢰가 우선입니다. 스페인 속담에 맑은 날만 계속되면 사막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수십년을 살아온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 어찌 맑은 날만 있겠습니까? 바람 부는 날은 서로에게 벽이 되어 주고, 비 오는 날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파트너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될 때면 파트너가 틀린 게 아니라 서로 자라온 환경이 달라서 그렇다는 것을 인지하고, 또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상대방이 하고 싶은 것을 먼저 하게 해주는 배려가 평생 동안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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