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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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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3-02-02 09:51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산 비둘기 한 마리가 베란다 난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주면서 땅콩 몇 알을 접시에 놓아두었던 것인데 다른 놈들은 오지 않고 이 녀석만 온다. '새 대가리'가 사람 머리보다 기억력이 나은 건지 내가 깜박 준비를 못했을 때에도 잊지 않고 찾아와 난간을 서성댄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새가 브런치를 즐기는 동안 나도 천천히 차 한잔을 들이켠다.

새들에게는 역사가 없다. 물고기도 그렇다. 새나 물고기가 종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은 부리나 주둥이로 길을 내며 다니기 때문이다. 목구멍을 전방에 배치하고 온몸으로 밀고 다니는 것들은 대체로 족적을 남기지 못한다. 스스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앞장서 달리는 입의 궤적을 지느러미나 깃털이 흐트려 버리기 때문이다.

누가 새들을 자유롭다 하는가. 하늘에는 새들이 걸터앉을 데가 없다. 목을 축일 샘 하나, 지친 죽지 부려 둘 걸쇠 하나 없다. 새들에게 하늘은 놀이터가 아니다. 일터다. 망망한 일터를 헤매어 제 목숨 뿐 아니라 주둥이 노란 새끼들의 목숨까지 건사해야 하는 새들은 녹두 알 만 한 눈알을 전조등 삼아 잿빛 건물 사이를 위태롭게 날며 기적처럼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마른 씨앗 한 알, 버러지 한 마리 놓치지 않고 적시에 부리를 내리 꽂아야 한다.

누가 새들을 가볍다 하는가. 날기 위해 뼛속까지 비운 게 아니라 뼛속까지 비웠기에 겨우 나는 것이다. 새들은 하늘에서 멈추어 쉴 수가 없다. 멈추어 쉬지 못하면 깊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벌어 먹기 위해서 살아온 사람의 행보가 별스런 자취 없이 흩어져 버리듯, '먹고사니즘'에 바쳐지는 시간들은 종적 없이 휘발되어 버린다. 하지만 깊이가 무슨 소용인가. 한 끼 벌어 한 끼 먹는 목숨 붙이 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존 뿐, 제 몸뚱이 하나로 길을 뚫으며 실존과 분연히 마주하는 새들 앞에서 새 대가리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여자들은 다 새 대가리야"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던 입사 동기 한 사람이 있었다. 상업학교를 졸업한 어린 처녀들이 많은 금융회사였으나 대학 나온 그보다 야무지고 똑똑했다. 남자 직원끼리 하는 말을 우연찮게 엿들은 꼴이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승진 시험조차 볼 수 없었던 나는 이래저래 분이 나서 퇴사할 때까지 그 하고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삼십 년 쯤 후 어느 예식장에서 마주친 그는 점잖은 목사님이 되어 있었지만 새 대가리인지 새 가슴인지 그때에도 나는 그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산 비둘기가 회 보랏빛 날개를 퍼덕거리며 토분 사이로 내려앉는다. 뭐 좀 더 주워 먹을 것이 없나 살피려는 듯 고개를 앞뒤로 주억거리더니 이내 훌쩍 날아오른다.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누군가가 진설해 놓은 지상의 밥 한 끼로 하루어치의 생존이 해결되었다 하여도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명체들에게 과거의 밥은 무효일 밖에 없다. 새를 날게 하는 동력도 지난 시간의 중력을 떨쳐 버릴 수 있는 '새 대가리'의 가벼움 덕분 아닐까.
새가 난다. 화살촉 같은 부리를 앞세우고 흐리고 막막한 도시 하늘로 두려움 없이 솟구처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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