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봉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초등학교 시절부터 바른 글씨체로 책 속의 글을 베껴 쓰는 것을 좋아했었다.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의 내용을 발췌해 정자체의 글씨로 문장을 따라 쓰는 것을 연습하곤 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가 문학 대전집을 당시 월부로 구매해서 선물로 사 주셨는데, 이 전집에서 처음 골라 읽게 된 책이 그 유명한 '처칠 회고록' 이었다. 처칠 회고록을 시작으로 한 권 한 권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재미있어서 24권의 대전집을 모두 섭렵하게 되었다. 특히 책에 나오는 글귀들이 내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길 때는 그 글들을 노트에 빽빽하게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책 속의 글에 나의 생각을 덧붙여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책 내용을 그대로 옮겨적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창작한 글도 함께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글쓰기의 시작은 책 속에서 감명 받은 문장을 베껴쓰는 글씨 쓰기 연습에서 비롯된 것 같다.
글씨 연습을 하는 이 습관은 중학교 시절 이후 저녁마다 매일 일기를 쓰는 일상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노트에 그 날의 날짜와 날씨를 기록하고 간단한 메모형식으로 수첩에 남겨두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간단한 메모는 문장으로 바뀌었으며 메모수첩은 일기장으로 바뀌었다. 사춘기 시절 일기 쓰는 밤은 하루를 돌아보며 마무리하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일기는 점점 사적인 비밀의 내용이 곁들어졌고 나만의 비밀을 간직한 비망록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동생이 대뜸 이렇게 물었다. " 형, 누구 좋아해? " 순간 난 동생에게 큰소리로 화를 내었고 그 날부터 학교에 일기장을 가지고 다녔다. 일기장을 집에 두면 동생이 또 뒤져볼까봐 수첩형태로 만들어진 일기장을 책가방에 매일 넣고 다니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가을로 기억되는데, 그 당시 고교 진학 시험 준비로 밤늦게까지 자습을 했었다. 어느 날 내 짝과 함께 저녁도시락을 먹으면서 메모할 내용이 있어서 수첩을 꺼낸다는 것이 그만 일기장을 꺼내고 말았다. 아차 싶어 급히 가방에 다시 집어넣었는데, 이를 눈치챈 그 친구는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가방에서 일기장을 몰래 꺼내가지고 사라졌다. 자습시간이 끝날 무렵 친구는 피식피식 웃으며 내 일기장을 가지고 나타났다.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친구를 보자마자 코피가 날 정도로 마구 때렸다. 이때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친구와 나는 교무실로 불려가서 반성문을 쓰고 일기장도 압수당했다. 내 비밀을 모두 들킨것 같아서 창피하고 자존심 상했던 그 때 그 마음은 한동안 잘 다스려지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당시 선생님이 왜 일기장을 가져가셔야만 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일기쓰기는 계속 되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윤동주 님의 '서시'를 처음 접했을때 난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그 시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그로부터 매일 저녁마다 하루일과를 한 편의 시로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일 년여 정도 시적 감성으로 가득차 있던 일기는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다시 변화하였다. 피천득 님의 수필집을 읽고 나서 그 분의 문체를 흉내내가며 일기를 써 내려갔다. 어느새 짧았던 나의 일기는 점점 서 너 쪽이 넘는 한 편의 수필로 바뀌어갔다. 이 때부터 나의 문학창작 활동의 기틀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대학 시절에는 'TIME' 동아리에 가입하여 회원들과 영문일기를 쓰고 함께 토론하는기회를 자주 가졌다. 졸업 때까지 계속된 나의 영문일기는 하루일과를 서툰 영어로 작성하면서 일기라기 보다는 영작문을 연습하는 영어 공부의 기능이 더 컸었던 것 같았다. 그 이후 사회인이 되어서는 직장생활에 바쁘다는 이유로 잠시 일기쓰기가 중단되었다. 한참 동안 일기의 존재를 잊고 지내다 결혼 후 첫째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를 메모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일기는 다시 새롭게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일기에는 가족들에 대한 사랑,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나 삶의 애환이 깃든 많은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큰 아이가 하키토너먼트 결승전에 연속 세 골을 넣고 우승하여 환호했던 날의 그 흥분된 감정으로 썼던 일기, 둘째 아이가 열감기에 걸렸을 때 빨리 나아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표현한 글, 그리고 어려울 때마다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기도문 형식의 일기들. 지난 과거의 많은 일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가며 인생의 지나온 길이 일기 속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가 있었다.
초로에 접어든 지금 나는 아들과 딸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보다는 손주에게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일기를 쓴다. 일기 속의 나의 과거들을 동화처럼 재미있게 들려주면 귀를 쫑긋 기울이고 듣고 있을 손주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제 일기는 나 혼자만이 간직하는 비밀이 아니라 지나간 내 인생사를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추억의 자료들이다. 가끔 책꽂이 한 켠을 가득 채운 예전 일기장 한 권을 집어들어 회고록처럼 다시 읽어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거리이다. 과거의 일기를 꺼내 읽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영화 주인공처럼 그리운 그 시절로 돌아가는 추억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일기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다. 힘들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난 어김없이 아침 저녁 아무때나 일기를 찾아 두서없이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그러면 일기 친구는 아무 말없이 편안히 다 받아주고 나에게 마음의 위안을 안겨준다. 오늘도 잠자리에 들기 전 어김없이 펜을 들고 일기장을 펼쳐 본다. 일기쓰기는 나에게는 일상의 소중한 습관이며, 이 시간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나의 소중한 글벗 일기, 늘 내 곁에 있어서 고맙고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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