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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2-07-18 09:15

박정은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샹들리에처럼 천장에 매달린 미용기구에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물리고 앉아있는 내 모습은 흡사 인조인간이 에너지를 공급받는 장면 같다. 꼭 그런 느낌인 게 머리카락이 감긴 미용기구마다 전기선이 가지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내가 머리를 통해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정말로 에너지를 받진 않더라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머리 스타일이 내게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같은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
머리 모양이 내 삶을 바꾼다! 어쩜 머리에게 너무 지나친 부담을 주는 생각일 수 있겠다. 하지만 미용실을 찾아드는 내 마음은 언제나 이런 기대에 부풀어 있다. 언뜻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기 저항감이 느껴지며 삶에 대한 회의가 밀릴 때면, 난 항상 이런 기대감으로 미용실을 찾곤 한다. 최근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 하나가 비 내리는 흑백 영상 같은 내 삶을 금방이라도 뚜렷한 컬러로 되살릴 것 같은 기대감, 그런 설렘으로 찾아드는 미용실을 난 간판만 다른 정신과 병원으로 착각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런 나의 착각은 매번 상상과는 다른 결과물 앞에서 미용사의 솜씨 탓이라는 궁색한 핑계를 찾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내 기대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단지 다음번엔 다른 미용실을 찾아가는 장소 이동이 있을 뿐이다. 이번엔 특별히 솜씨 좋은 미용사를 찾아왔으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겠지? 성질 급한 내 상상력은 벌써 몇몇 여배우들의 이미지를 섞어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하고 순수한 완벽히 변신한 내 모습을 몽타주 화하기 시작한다. 이번엔 머리도 당기고 고개도 돌릴 수 없는 아주 불편한 자세지만, 그래도 요즘 유행하는 컬을 만들어준다고 하니 충분히 인내할 가치가 있겠지. 난 미용사에게 조금이라도 불편한 내색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얼굴에 어색한 미소나마 풍부히 담은 채 눈을 감아버린다.
그런데 언제부터 내가 유행 앞에서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게 되었지? 아마 긴 생머리를 자르던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중학교 시절부터 기르기 시작한 허리까지 닿는 긴 생머리를 간호사가 되어 병원에 들어가 생활할 때까지 고집스레 유지했었다.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둥그렇게 말아 올리고 근무를 나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그 정도의 불편함은 내 머리 사랑에 장애가 되질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촌스러운 머리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의 난 그 긴 머리의 찰랑거림이 한없이 좋았고, 무엇보다 그 머리는 나에게 순수한 느낌이 들게 해줬다. 하지만 그런 내 머리 사랑이 조금씩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 건,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를 간호할 때부터였다. 특히 항암치료로 머리가 다 빠진 여자 환자를 간호할 때면 지나치게 긴 머리를 지닌 나 자신이 민망해지곤 했다. 그러던 중 난 항암치료를 받는 젊은 여자분을 알게 되었다. 소녀 같은 미소가 채 가시지 않은 젊은 분이었다. 빠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검은 모자를 꾹 눌러쓰고 온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난 항상 마음으로만 생각했던 걸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항암치료를 받는 여자분들은 치료가 실패해서 죽는 것보다, 그에 앞서 아름다움을 잃어가면서 삶의 의지를 꺾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난 여자에게는 어쩜 두 개의 생명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나는 하늘이 준 생명이고, 또 하나는 아름다움이라는 생명. 전자는 나눌 수 없는 생명이지만, 후자는 나눌 수 있는 생명이었다. 난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그 자른 머리로 그분께 단발머리 가발을 해드릴 수 있었다. 그것만이 내가 그분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이었다. 그러나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내가 나눠준 생명은 그분과 함께 무덤에 묻히고 말았다.
그렇게 머리를 자른 이후로 난 계속 머리를 바꾸었다. 단말, 파마, 숏커트, 스트레이트, 지금의 디지털 파마에 이르기까지 난 그때그때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한 번도 긴 생머리처럼 나 자신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머리가 없었다는. 어쩌면 그 생머리 자체보다도 그때 내가 지녔던 인간다운 마음이 현재의 나에게 없기 때문은 아닐까?
문득 이런 생각까지 든다. 내가 머리의 유행을 따르던 그 시기부터 난 나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을 버리고 어떤 사고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았나 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머리나 패션의 유행 말고도 사고에도 유행이 있다. 사고의 유행은 우리가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긴 세월을 지배하는 어떤 주의이다. 아무리 유행이라도 그 머리 스타일이 나에게 어울리나 그렇지 않으냐는 금방 분별할 수 있지만, 사고는 그렇지가 않다. 단기간의 유행이 아닌 아주 생명이 긴 유행이라서, 그 속에 침몰해있으면 그 삶이 나에게 어울리는지 아닌지 평가할 수가 없다. 그저 그 속에서 허우적대며 평생을 소비할 뿐이다. 지금의 나처럼 내 정신의 흐릿함을 머리 스타일로 밝혀볼까 하는 가망 없는 답답함을 느끼면서. 지금의 난 머리 스타일의 유행을 좇는 만큼이나 이 사회의 유행을 좇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을 큰 집과 좋은 차와 바꿀 듯이 하나라도 더 소유하기 위해 나눔을 잊고 산다. 어느샌가 본질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 내 삶을 채우기 시작했고, 이젠 그것들이 내 삶을 지탱하는 매우 필수적인 것임을 의심도 하지 않고 살고 있다. 난 머리 스타일이 나에게 어울리나 그렇지 않으냐는 세심하게 따지면서도, 내 정신의 무게나 투명도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관심했었음을 깨달았다. 진짜 나 자신을 뚜렷하게 해주는 건 머리 스타일이 아니라, 내 삶으로부터 비본질적인 것들을 거듭거듭 버릴 줄 아는 내 정신에 있는 건 아닐까? 난 당장이라도 미용실을 나가 하얀 대국을 사 들고, 내 머리가 묻힌 그분의 무덤을 찾아가 애도하고 싶었다. 한 송이는 그분을 위해, 또 한 송이는 거기에 같이 묻혀버린 맑았던 내 정신을 위해.
미용사는 거울 속에 비친 나에게 자신이 만든 머리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그의 마음을 헤아릴 겨를이 없는 난 수고했다는 말만을 겨우 남기고, 급히 미용실 문을 나왔다. 미용실 밖 길가에는 낙엽들이 뒹굴고 있었다. 아! 벌써 잎이 가지를 떠나는 계절이구나! 나도 매 순간 저 나무처럼 어떤 불필요한 것들을 떨쳐낼 수 있다면, 내 삶에도 새잎이 피는 봄이 올 텐데. 정말 이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나 유행의 늪에서,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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