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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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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1-11-16 17:00

반숙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시월도 중순에 접어 들면서 뒤란 장독대에 쏟아지는 햇살이 한결 엷어졌다. 들판은 서서히 황금
물결에서 허허로운 벌판으로 변해 갔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떠들썩하다. 나는 책 좀 읽자고
평소의 버릇대로 주방에는 신문을, 화장실에는 수필집 한 권을, 안방에는 논어를, 서재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비치해 놓고 진지하게 읽자고 다짐하나 허사다.
책 한 페이지를 읽는 동안 창 밖에서 부르는 소리 뜨거운 손짓 때묻은 내 영혼까지를 씻어 내릴
듯한 청정한 햇볕과 바람과 앉아 있어도 밖으로만 치닫는 늦가을의 여심. 나는 바구니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과수원 가득 우리집의 가을은 익어가고 있었다. 호박덩굴을 헤치고 애호박을 따다가 양지를 골라
호박고지를 썰어 널고 깻잎 부각도 가지런히 널고 댓돌에 앉으니 세상 아무것도 부러운 것 없이
평화롭다. 노랗게 물든 깻잎을 딴다. 송이마다 까뭇까뭇 열매를 보듬고 풍성했던 가을을 전송한다.
어떤 잎은 소슬바람에 조차 사그락 떨어져 내린다. 한 잎 또 한 잎 채곡채곡 따 모으는 내 손끝에서
가을은 점차 사라지는 것이다.
애고추 지고추를 따 들이고 고구마 줄기도 넉넉하게 따서 삶아 말린다. 가지는 끝물이라
못생겼지만 열 십자로 칼집을 내어 빨래 줄에 넌다. 누가 푸짐하게 먹는다고 손가락 한 개 성한
것이 없도록 극성스럽게 따 들이느냐고 그이의 핀잔을 받으면서도 연일 들로 밭으로 내 닫는
속셈은 비밀스러운 음모다.
나는 그 일 속에서 내가 따뜻한 여성임을 부지런 하고 알뜰한 아낙임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정갈하게 말려서 몫몫이 비닐 봉지에 갈무리할 때 나는 참 행복해진다. 눈 쌓인 겨울에 가을
보따리를 풀고 다시 한번 즐거웠던 회상에 잠기는 멋, 얼마나 즐거운가. 멀리 있는 부모님께
며느리의 정성을,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사랑을, 친구에게는 변치 않는 옛정을, 다독다독 꾸려 보낼
양이면 추운 겨울도 녹아내리겠지.
탐스런 사과를 딴다. 손바닥 가득 행복을 딴다. 땀 흘린 만큼의 수확을 공평하게 받아 들고
감사하는 농부의 주름진 두 손안에 진실이 고인다. 나도 힘겨웠던 지난 계절은 깡그리 잊고 공짜로
얻은 오늘인 양 마냥 기쁘다. 이렇듯 계절을 내 손으로 따면서 내가 남자 아닌 여자로 태어남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하는지, 세상을 휘두르는 남정네의 업적도 위대 하지만 더 많은 곳에서
흔적 없는 일에 여인만의 아픔을 묵묵히 견뎌내며 사랑과 정성을 쏟고 사는 여인들이 있어 세상은
아직껏 따습고 살만 한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단명한 여인처럼 서둘러 가을해가 지고 나면 노을이 토해 놓고 간 각혈 한 사발, 들녘은 취해서
불그레하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우주의 생멸을,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며 인간의 종말을
묵상한다. 언젠가는 돌아가는 나그네의 여로. 착하게 살아야지.
치마폭 가득 계절을 따 담고 논둑 길을 걸어오며 아름다운 내 조국에 순하디 순한 충청도 여인으로
태어나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는 분명 축복받은 생명임을 무한히 감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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