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봄이 오는 밤에 2022.05.03 (화)
밖에는 봄비가 소근거린다. 눈이 침침하여 스탠드를 밝히고 씨감자를 쪼개다가 창문을 열었다. 희미한 전광으로 세류 같은 빗줄기가 뿌우연하다. 봄비는 처녀비다. 수줍은 듯 조그맣고 고운 목소리로, 보드라운 손길로 가만가만 대지를 적시고 나무를 어루만지며 구석구석 찾아 다니고 있다. 가장 작은 풀씨까지 빼놓지 않고 먼 강남의 밀 향기 같은 봄소식을 전해준다. ​오늘 낮에 텃밭에 춘채春菜씨를 넣었다. 삽질을 하다 보니 주먹만한 돌멩이가...
반숙자
문밖의 손님 2022.01.12 (수)
옥련나무 잎에 바람이 설렁대는 아침이다. 아파트 뒤뜰이라 해가 비치기에는 이른 시각에 주방창 앞에 새가 한 마리 날아들었다. 새는 힐끔거리며 경계를 하는 듯했다. 아침마다 하는 일로핸드밀에 커피콩을 넣고 가는 중이다. 커피 향이 코끝에 감도는 이 순간이 좋아서 커피 맛도제대로 모르며 아침마다 거룩한 예식을 하듯 커피콩을 간다. 내가 커피 향에 취해 커피를 내리는동안 새는 여전히 두리번거리며 유리창으로 나를 관찰한다.비둘기다. 잿빛...
반숙자
시월도 중순에 접어 들면서 뒤란 장독대에 쏟아지는 햇살이 한결 엷어졌다. 들판은 서서히 황금물결에서 허허로운 벌판으로 변해 갔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떠들썩하다. 나는 책 좀 읽자고평소의 버릇대로 주방에는 신문을, 화장실에는 수필집 한 권을, 안방에는 논어를, 서재에는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비치해 놓고 진지하게 읽자고 다짐하나 허사다.책 한 페이지를 읽는 동안 창 밖에서 부르는 소리 뜨거운 손짓 때묻은 내 영혼까지를 씻어...
반숙자
겨울 섬진강 2021.01.25 (월)
반숙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어째서 섬진강이라는 단어를 입에 물면 아련한 그리움이 되는지 영문도 모르면서 겨울 섬진강을 보러 길을 떠났다. 임진강, 두만강, 남한강, 낙동강, 강 이름을 대보지만 섬진강만큼 살갑게 다가오는 뉴앙스는 없다. 왜 그럴까. 김용택 시인이 섬진강에 빠져서 빼먹을 대로 빼먹은 강이건만 사람들 가슴에 신기한 기름을 불어넣는 이유는 무엇일까.나는 오래 전부터 그런 의문을 가슴에 품어왔다. 봄이 와서 벚꽃이 피면...
반숙자
물소리로 밤새 뒤척였다. 대관령 자연휴양림 객창에 들리는 계곡 물소리가 나그네 심정을어르기도 하고 휘젓기도 하여 뜬눈으로 한밤을 보내고 새벽녘 에야 단잠이 들었다. 어찌물소리를 탓하랴. 강릉이라는 말만 들어도 잠재우고 쓸어 덮었던 그리움의 올이 낱낱이살아나는 내 천형의 한을. 올 수필의 날 행사가 강릉에서 열린다는 통첩을 받은 날부터 내 가슴에는 그리운 얼굴들이영상으로 지나갔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강릉 어딘 가에 살고...
반숙자
생명이 있는 뜰 2020.07.06 (월)
농막이다. 뒤로는 오성산이 나지막이 엎드려 있고 앞으로는 음성 읍내가 한눈에 들어오는서향집, 다 낡은 구옥이 내 창작의 밀실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자잘한 채소를 키워 먹고과일나무 서너 그루씩 흉내만 내는 미니 과수원이다. 지금 밖에는 태풍이 몰고 온 비가 종일 내리고 있다. 산자락이거나 계곡을 피하라는 텔레비전보도가 있었지만 몇 그루 안 되는 과일나무와 다 늙어 쇠잔한 농막이 걱정이 돼서 올라왔다.밭고랑에 수로를 따주고 처마...
반숙자
SAMO ONDOH 2020.04.20 (월)
예술적 온도가 맞는다는 이유로 활화산처럼 타오른 사람들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예술가들에게는 종종 일어나는 것은 무모함일까, 열정일까, 뜨거운 사람들의 사랑이 매스컴에 오를 때면 생각해 보는 숙제다. 지난겨울 결혼 청첩장을 받았다. 성장한 신랑신부가 혼인예식을 올리기 전에 찍은 웨딩 사진 몇 컷을 청첩장에 넣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나 이 청첩장에는 예비신랑신부의 사진대신 선으로만 그려진 인형같은...
반숙자
                                 음성 장날 고추 모 세 판을 사다 심었다. 오이고추, 청양고추, 일반 고추다. 모종을 파는 상인의 생존율 100%라는 부연설명까지 들어서 그런지 땅내도 못 맡은 모종들이 싱싱하기가 청춘이다. 모종을 심고 나면 한 보름 동안은 빈약한 떡잎가지 시들배들한다. 겨우 어른 손 길이만 한 어린 것들이 적어도 보름 정도는 죽느냐 사느냐 사투를 벌일 것이다. 그...
반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