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아침부터 후끈한 열기가 대기를 가득 채운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기는 정체되어 끈적거리고 걸쭉한 용액이 된다. 정체된 공기는 숨을 틀어막는다. 점성이 높은 공간 속에서 살아있는 것들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모두 죽은 듯 박제되어 있다. 꽃도 나무도 그림 속의 한 장면처럼 정지해 있다. 매미가 한껏 용을 쓰며 소리를 내보지만 걸쭉한 대기에 가로막혀 안쓰럽게 스러질 뿐이다.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프록스는 마치 조화 같다. 비가 오지 않고 건조한 날이 이어지니 꽃이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다. 건조한 날에는 꽃들이 영 맥을 못 추는데 프록스는 비가 오지 않아서 더 생생하다. 이러니 조화 같을 수밖에. 프록스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름 꽃이다. 개화 기간이 긴 것이 이 꽃의 가장 큰 장점이다. 오래도록, 게다가 항상 같은 모습으로 피어 있다. 화무십일홍이 무색하다. 몇 주 동안이고 계속 생생해서 영원히 지지 않을 것만 같다. 가장 오만한 때의 태양 앞에 당당히 맞서는 한여름의 전사다. 끈적거리는 대기에 잡혀 있지만 태도는 의연하다. 가느다란 가지에 작은 꽃들로 이루어진 크고 둥그런 머리를 달고 있는 모습이 낮에 밝혀 든 알록달록 등불이다. 프록스는 여름을 이기는 최고의 능력치를 지녔다.
옆으로 고개를 치켜든 원추리는 매일 같으면서 매일 다르다. 오렌지색의 꽃이 늘 같은 모습이어서 언제나 그대로인 듯하지만, 어제 핀 꽃은 지고 오늘은 새로 난 꽃을 단 것이다. ‘어제는 어제로, 오늘은 다시 새롭게’가 원추리의 모토이다. 늘 새 옷을 입고 나타나니 그 꽃잎은 때깔도 곱고 산뜻하다. 프록스가 등불이라면 오렌지색 원추리는 횃불이다. 태양이 땅으로 내려온 듯한 모양과 강렬한 색채를 보면 지쳐 있던 나는 늘 생기를 얻는다. 그래서 여름이면 참 고마운 꽃이다. 잠시 생기를 뿜던 원추리도 한낮의 뜨거움 아래서 젤리 같은 공기 속에 오렌지색의 스티커로 박혀버린다.
가엾어라, 수국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벌겋게 녹이 슨 잎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태양 앞에 승복하고 패배를 받아들이고 있다. 빨간 반점투성이의 두 손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수국이 가장 왕성한 시기가 여름인 데도 태양의 공격에 타격이 크게 입어 무력하다. 이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그런 것 같다. 나이를 먹고 튼튼한 수국이라면 이렇게 빨리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다. 올여름엔 엎드리고 항복했지만 내년이면 태양과 맞짱 뜰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겨울 동안 냉해를 입지 않도록 잘 관리해주어서 내년엔 튼튼한 여름 꽃으로 만들리라 다짐한다.
태양이 끗발 날리는 시기이다. 태양은 강한 기세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태양열로 겔 화된 대기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붙들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이 기세에 못 이겨 생명체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다. 숨마저 멈추고 눈을 감는다. 그렇다고 태양이 승자는 아니다. 한껏 패악을 부리는 태양의 폭압 속에 사그라져갈 그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막 기세 등등한 초여름과 달리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춘 한여름의 공기에는 거인의 쓸쓸한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패배를 인정하고 스스로 사라져가는 거인이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걸까, 힘없이 울음을 토해내던 매미들이 울음소리를 높인다. 높아진 매미 소리가 막혀 있던 대기 사이로 길을 낸다. 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놀기 시작한다. 대기의 끈기가 풀어지고 정체는 느슨해진다. 한여름 속으로 가을이 스멀스멀 스며든다.
올봄부터 옆 대지에 새로 집을 짓는 공사가 시작됐다. 조금씩 높아가는 벽과 둘러친 비계가 정신없고 심란했다. 한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드는 요즘까지도 부산하기 그지없다. 마당에 나가기가 싫었다. 핑계 김에 쉬어 가자 싶어 마당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풀도 뽑지 않고 새로 꽃들도 심지 않았다. 사실 사람이 많이 간섭하지 않았을 때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도 했다. 봄부터 매일 한두 시간은 마당에서 보내던 일과가 없어졌다. 풀도 나름 자라고 꽃들도 제각각 피어났다. 여름까지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피고 지는 모양을 노동의 수고 없이 즐기는 맛도 있었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마당은 깔끔하지 않아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장마가 지나고 본격 무더위가 시작되자 확연히 달라지긴 했다. 풀들이 하늘에 닿을 듯이 자라 드디어 일손을 불렀다. 뙤약볕 아래에서 그저 조금 손질을 하자 볼만한 정원으로 돌아왔다. 아침이면 뭐가 그리 바쁜지 정신없이 짹짹거리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새들은 언제 봐도 귀엽고, 해가 질 무렵 쏟아지는 황금빛 색조는 여전히 무한한 감동의 원천이다. 모든 자연의 요소들이 서로 어우러지는 정원을 보며 많이 애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살면 서로 닮는다더니 조금 못생긴 정원의 생김새대로 나도 따라가는 것 같다.
기세를 떨치던 무더위는 갑작스레 사라져간다. 한여름의 끈적한 대기도, 그 안에 갇혔던 나도, 찍어 눌린 듯 멈추어 섰던 꽃들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을로 이동하고 있다. 바람이 불고 벌레는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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