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할머니의 손주 사랑

이현재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1-08-17 08:48

이현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파도는 하루에 70만 번이나

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벌새가 사는 법/ 천양희)


기어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세 살배기 손주가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손잡이가 높았으나 영특한 아이가 까치발로 서서 문을 열었다. 이를 발견한 아내가 바로 뒤쫓아 나갔다. 잠시 후 꽈당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주를 안고 나타난 아내의 얼굴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급히 뛰어나가다 다리가 꼬이며 앞으로 넘어졌단다. 아내는 넘어지며 손과 머리가 시멘트 바닥에 거의 동시에 닿는 바람에 머리에 부딪히는 충격을 손바닥이 온전히 흡수하지 못했다.


이마를 짚고 있는 아내의 손을 치우자 밤톨만 한 혹이 보이고 거기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혹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마치 고속 카메라로 봄날 피어나는 꽃을 찍듯이, 어린 시절 풍선껌을 입에 넣어 불듯이 눈에 보이게 부풀어 올랐다. 골프공만 하게 부풀어 오르던 혹은 이내 믿을 수 없는 크기인 테니스공만큼 커졌다. 속이 상한 큰 딸아이는 손주를 큰 소리로 꾸짖었고, 영문을 모르는 손주는 엄마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911에 전화하고 남자 친구와 데이트 중이던 막내딸 앤에게 연락을 했다. 막 저녁을 먹으려던 앤은 수저를 집지도 못하고 통역을 위해 포트무디 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려왔다. 응급실은 대기하는 환자들로 북적거렸다.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으나 다행히 아내에게는 빨간 색깔의 익스프레스 카드가 있었다. 암 수술 후 병원에서 받은 카드로, 아내같이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진 기저 질환자들에게 발급하는 일종의 급행 카드였다. 아내의 이마에서 테니스공만 한 혹을 확인한 직원은 ‘오마이 갓!’ 하며 재빠르게 수속을 밟아 주었다. 응급조치하고 CT를 찍고 여러 가지 검사를 한 후 수액을 맞으며 결과를 기다렸다.


병원에 온 지 서, 너 시간이 지난 자정 이후에야 검사 결과가 나왔다. 담당 의사는 CT상으로 보기에 머리뼈에 이상은 없으나 부기가 심하므로 계속해서 냉찜질을 하라고 했다. 뇌진탕 증세는 현재 없지만, 뇌는 플라스틱 상자 안에 든 두부 같아서 상자를 심하게 흔들거나 떨어뜨리면 상자는 멀쩡하나 속에 있는 두부는 부서지듯이 뇌도 비슷한 손상을 입을 수 있다고 했다. 지금 당장은 그런 증세가 나타나는지 알 수가 없으니 퇴원 후 집에서 요양하다가 속이 메슥거리거나, 구토, 어지럼 등의 증상이 있으면 지체없이 다시 방문하라고 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마에 큼지막한 붕대를 하고 집에 아내에게 손주인 유진이가 야속하지 않냐고 했더니, 손사래를 치며 그렇지 않아도 집에 오는 속에서 계속 기도했다고 한다. “하느님! 유진이 대신 저를 다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라고……아내는 새나 파도와 같이 몸을 치며 손주를 돌보는 보였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나의 문학 수업기 2024.01.22 (월)
  학원이란 잡지가 있었다. 1960 년대 중, 고교생들의 인기 잡지로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소년, 소녀 문사들의 문학 등용문 역할을 했다. 참으로 글을 잘 쓰는 친구들이 많았다. 거기에 실린 주옥같은 글들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저들처럼 멋지게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하고 한탄하고는 했다.  필자가 다녔던 대전 중학교 도서관은 규모가 꽤 큰 편이었다. 동, 서양의 고전을 비롯해 현대물, 교양 서적 등 만 여권의 장서가 사방 벽면을 가득 메우고...
이현재
  막내딸이 지난 5월 멕시코 칸쿤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렸다. 5월의 신부가 되었다. 양가 직계 가족과 신랑, 신부 친구들 각 3쌍씩만 초대한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신랑, 신부 친구들은 7박 8일간의 모든 경비를 자비로 부담했다. 따로 청첩장도 만들지 않았고 축의금도 일체 사양했다. 반강제로 주시는 분들만 어쩔 수 없이 받았다.칸쿤 공항에 도착하니 수십 명의 제복 입은 직원들이 일렬로 도열해서 우리를 영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택시...
이현재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50년 절친 L이 카톡을 보내왔다. 모교 졸업 50주년을 기념하는 추억담을 모집하고 있으니 글 한 편 보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해외로 떠난 지 20년이 넘는 친구를 여전히 잊지 않고 배려하는 마음이 고맙다.고교 1학년 때 담임은 영어를 가르쳤던 H...
이현재
인생의 시계가 황혼을 향해 움직일 때누군가를 받아들이고, 또 누군가를 토닥거리며마음 졸이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사랑할 수 있는 날이내겐 정말 얼마나 남았을까? /김재진(시인)오래전부터 허리가 부실해 쉬는 날이면 자주 산책하러 나간다. 침도 맞고 여러가지 한방치료도 해봤지만 좋아지는 듯하다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고는 한다. 전문가들 말로는 많이 걸어서 허리 근육을 강화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한다. 산책하며 이런저런 사람과 마주친다....
이현재
체질학 개론 2022.02.09 (수)
“얘 입술이 왜 이래?”화장실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달려가 보니 손주의 윗입술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처음엔 깨문 줄 알았다. 그런데 약식을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먹었다기보다는 입에 넣었다 바로 뱉었다고 한다. 약식에 호두가 조금 들어가 있었고 손주는 호두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을 깜박했다. 큰 딸은 사색이 되어 가방을 뒤적이며 비상용으로 갖고 다니던 알레르기 주사기를 찾고 있었고 사위는 근처 약국을...
이현재
이현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벌새는 1초에 90번이나제 몸을 쳐서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파도는 하루에 70만 번이나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벌새가 사는 법/ 천양희)기어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세 살배기 손주가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손잡이가 높았으나 영특한 아이가 까치발로 서서 문을 열었다. 이를 발견한 아내가 바로 뒤쫓아 나갔다. 잠시 후 꽈당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주를 안고 나타난 아내의 얼굴에는 선혈이...
이현재
이현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젊은 시절에는 하루는 짧고 1년은 길다.나이를 먹으면 1년은 짧고 하루는 길다. /베이컨 다가오는 설날이 되면 한 살을 더 먹는다. 서양사람은 본인 생일이 지나면 한 살을 더 먹지만 한국 사람은 설날이 지나면 공평하게 한 살씩 더 먹는다. 올해 70이 되었다. 나이 60도 용서가 안 되었는데 70이다. 29년 전 장인어른의 칠순 잔치가 생각이 난다. 잠실에 있는 대형 뷔페를 통째로 빌리어 친화력 좋은 둘째 처남 주도하에...
이현재
숀 코너리와 제임스 본드   이현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특유의 제임스 본드 테마(James bond Theme)음악이 깔리며 총구 모양 프레임 속에서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가 서서히 걸어오다가 갑자기 관객을 향해 권총을 발사한다. 이어서 10여 분간 장쾌한 액션이 펼쳐진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숨 막히는 화면 전개가 끝나고 나면 섹시한 무용수들의 몽환적인 춤과 함께 스태프 소개가 이어진다. 007시리즈의 독특한 도입 부분이다. 중학생 때 ‘007...
이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