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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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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0-08-31 08:48

이현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태어나서 가난한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죽을 때도 가난한 건 당신의 잘못이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건 죄가 아니지만
지금 화목하지 않은 건 당신의 잘못이다 -빌 게이츠-
 
해마다 8월이 되면 이민기념일을 자축한다. 1997년 8월 19일 아내와 중3인 딸, 초등학교
1학년인 딸, 이렇게 4식구가 밴쿠버 공항에 도착했다. 2시간여의 지루한 이민 수속을 마치고
공항 로비에 나오니 민박집 주인이 플래카드를 들고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벤을 타고 민박집으로 향했다. 코퀴틀람에 위치한 민박집은 3층 단독주택이었다.
앞에서 보면 1층이고 뒤에서 보면 반지하인 공간이 우리가 보름간 머물 곳이었다. 한 개의
침실과, 덴, 거실, 그리고 욕실과 주방, 별도 출입문이 갖춰진 독립된 공간이었다.
8월이었는데도 내부는 약간 추웠다.
 
 다음날 우리가 이사할 타운 홈을 보러 가기로 했다. 민박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였는데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집들이 모두 예뻤다. 저런 집중에 하나려니 생각하고 있는데
짙은갈색으로 칠해진 우중충한 타운 홈이 수십 채 있는 곳에서 차가 멈추었다. 설마,
이곳이......?  그림 같은 집을 상상했던 아이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부는 그나마
좀 나았다. 카펫이 깔린 거실 한복판에 장작을 때는 큼지막한 벽난로가 있었고 이층에는 방이
3개 있었다.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뒷마당엔 파란 잔디가 깔려 있어 그나마 좀 위안이 되었다.

대충 둘러본 후 민박집 주인은 차를 보러 가자고 했다. 캐나다는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차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제 도착해 시차 적응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포트무디에 있는 혼도 자동차로 향했다. 민박집 주인은 빈 봉투 하나를 내밀며 백 불
정도를 넣으란다. 딜러와 차 값을 흥정할 때 필요하다고 했다. 캐나다는 길거리에 지갑이
떨어져도 줍지 않는 청정국가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봉투가 통하는 나라인 줄은 몰랐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아마도 주인은 봉투와 약간의 사례금을 챙겼을 것이다. 다음날부터
주인집의 벤은 차고에 점잖게 있고 내 차로 각종 정착 관련 일을 보았다. 방학이라 때로는
초등생인 주인집 애들이 동행했고 햄버거 구매 등 먹거리 비용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이민
레슨비를 톡톡히 치르고 갈색의 타운 홈에서 10개월 정도를 살고 밴쿠버 근교의 미션으로
이사를 했다. 
 
 인구 3만 정도의 소도시 미션은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이 드물어 슈퍼스토어에 장을 보러 가면
손님들이 우리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는 했다. 처음 시작한 비즈니스는 병원 안에 있는
커피숍이었다. 한국에서는 다방 커피만 있던 시절이라 라떼, 카푸치노 등 수십 종류의 커피는
만들기는 고사하고 이름조차 외우기가 버거웠다. 본사에서 일주일간 교육을 받고 몇 달간 교포
여학생을 헬퍼로 쓰며 배울 수밖에 없었다. 병원 내에 있어 장사가 잘될 줄 알았는데 손님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캐나다의 병원 문화를 잘 몰랐던 탓이었다. 환자들 입원 기간이 짧고
보호자나 방문객의 내왕이 드물어 도떼기 시장같은 한국의 종합병원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일 년 반을 버티다 헐값에 팔고 일식집을 창업하게 되었다. 두 달 정도면 공사를 끝낼
수 있다던 백인 건축업자는 10개월을 끌었다. 비용은 예정보다 세배가 더 들어갔다. 일식집을
창업하면서 겪은 잔혹사는 따로 책을 한 권 내도 될 정도로 길고도 혹독했다. 개업 날에는 미션
시장이 직접 찾아와 축하를 해주었다. 독특한 일본식 인테리어 때문에 한때 작은 도시 미션에서
화제가 되었고, 점심시간에는 초등학생들이 교사의 인솔 아래 스시가 곁들인 도시락을 먹으며
동양문화를 체험하러 오기도 했다. 막내를 제외하고 전 가족이 비즈니스에 매달려 자연히
가정사는 소홀해졌다. 학교생활에 적응하기도 힘들었을 애들을 돌보지 못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때 3층짜리 예쁜 타운 홈도 구입했다.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하는 순간이었다. 6년 동안 일식집을 운영하고 매각했다. 자유인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당시 꿈의 직장이라던 은행에서만 평생을 보냈는데, 캐나다에서는 자유인이 된 후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게 되었다. 주유소 헬퍼, 공병가게, 서브웨이, 생선 공장, 스시맨,
쇼핑몰관리, 마트 종업원, 생명보험 및 재무설계사...... 그리고 틈틈이 취미인 글쓰기를
지속하여 2007년 한국의 미래문학사 추천으로 수필가로 등단하게 되었다. 빌 게이츠의 말처럼
돈은 많이 벌지 못했지만,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중 하나가 가족여행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 년에 한 번 이상은 가족여행을 했다. 일식집을 운영할 때는 정문에
안내문을 붙여 놓고 일주일씩 문을 닫았다. 그리고 여행을 떠났다. 록키, 오카나간, 오소유스,
위슬러, 토피노, LA 등 미 서부와 오레곤코스트, 작년의 알래스카 크루즈까지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 풍족한 지원은 하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만큼은
누구보다도 풍부하게 해주고 싶었다.
 
  올해 8월 19일은 이민 23주년 기념일이다. 매년 이날은 온가족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케이크를 자르며 자축을 하고는 했다. 그러나 올해는 모두들 알다시피 변수가 생겨 집에서
자축을 해야 할 듯하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돌림병이 창궐해 평범한 일상을 기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니...... 매일이 기적인 일상을 평범하고 당연한 듯 여겨온 우리에게 신이
보내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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