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순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악! 엄마!”
갑자기 누나가 소리를 질렀어요. 집안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큰엄마 큰아빠 모두가
놀라서 달려 나왔어요.
“하나야, 왜 그러니?”
큰엄마는 신발도 신지 못하고 달려 나왔어요. 누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어요.
“누나! 지렁이야. 지렁이는 안 무서워.”
“징그럽잖아. 어서 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밟아.”
“지렁이는 빨리 도망치지 못해 누나! 생명이 있는 건 죽이면 안 돼.”
“그래도…….”
“허허! 생명이 있는 건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는 삭이 말이맞다.”
할아버지가 칭찬했습니다.
우리 식구는 주말에 할아버지 별장에 왔어요. 큰아빠 식구들도 다 왔어요. 할아버지가 지난번에
많이 아팠어요. 할아버지가 많이 아팠지만, 코로나 때문에 병문안을 올 수가 없었어요. 이제 열 명
정도는 모여도 된다고 해서 온 거예요. 우리가 다 모이면 딱 열 명이거든요. 큰아빠네 네 명, 우리
식구 네 명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요.
“누나!”
우리는 지난 크리스마스 여행 때 올랜도 디즈니월드에서 만난 이후 처음이에요. 너무 반가워
달려가 누나에게 안기려 했어요. 하지만 누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팔꿈치를 내밀었어요. 나는 잠시
서먹했지만 금세 괜찮아졌어요.
“아이고 내 새끼들 왔구나?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할아버지, 안녕하셨어요?”
2
할아버지가 로봇 팔처럼 커다란 팔로 동생과 나를 한꺼번에 안아주었어요. 할머니는 주방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계셨어요. 나는 주방으로 달려가 할머니 허리를 껴안았어요.
“아이고 내 새끼들!” 하면서 할머니도 나와 동생을 두 팔로 안아 주었어요. 배가 몹시 고팠어요.
할머니가 만들어준 무 소고깃국이 너무나 맛있었어요.
“아, 맛있다. 맘, 맘도 할머니처럼 소고기 슙 해주지, 참 맛있어요.”
“하하, 우리 삭이는 할머니가 끓인 국이 맛있나 보지. 많이 먹어라.”
“네, 할아버지.”
“할머니, 올해는 텃밭에 어떤 채소 심었어요?”
“음, 우리하나가 좋아하는 건 다 있지.”
“엄마가 좋아하는 비트도 있어요?”
“그럼 있고말고. 작은엄마가 좋아하는 토마토도 있지.”
“이 나물도 할머니가 키우신 거예요? 맛있어요.”
“그려, 하나는 할미 닮아 채소를 좋아하는구나.”
누나와 나는 밥 한 그릇을 뚝딱 다 먹었어요.
“할머니 잘 먹었습니다.”
“오냐. 잘 먹어 좋구나.”
“우리 이삭이 할머니 댁에서 살아야겠다. 이렇게 밥을 잘 먹으니까.”
집에서 편식한다고 늘 잔소리를 들었으니 엄마가 의아해했어요.
근데 이상하게 할머니 댁에만 오면 밥이 정말 맛있어요. 숟가락에 마술이 걸려있나 봐요.
“이제 집에서도 잘 먹을게요. 맘!”
“허허, 우리 이삭이 살이 좀 쪄야겠다.”
나는 대답 대신 뒷머리를 긁었어요.
“나가 놀아도 돼요? 할머니.”
“그러렴.”
3
“우리 가든에 가서 풀 뽑자.”
누나가 말했어요. 텃밭에는 싱싱한 채소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어요.
“누나, 풀이 없어,”
텃밭에는 풀이 한 포기도 보이지 않았어요.
“나 당근 캘 거야.”
누나가 호미를 들고 당근 이랑으로 들어갔어요. 당근을 캐려고 호미로 땅을 찍었어요.
“에게, 아직 너무 작아. 다른 것을 뽑아볼까?”
누나가 다시 호미로 땅을 찍자 지렁이가 꿈틀거렸어요. 놀라 큰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집안에서
어른들이 다 밖으로 달려 나왔던 거예요.
“안 돼, 누나! 호미로 지렁이를 찍으면 죽잖아.”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몸을 비틀었어요. 나는 얼른 두 손으로 흙과 함께 지렁이를 퍼 올렸어요.
“많이 놀랐지? 누나가 모르고 그랬어. 내가 대신 사과 할게. 미안해.”
“넌 징그럽지 않아?”
“뭐가 징그러워. 부드럽고 좋은데.”
“야, 더러워, 버려. 넌 꼭 지렁이 형아 같다. 후후!”
누나는 여자니까 놀래긴 했을 거예요. 나는 그때 옆에서 달팽이가 채소 잎 뒷면에 붙어 있나 살피고
있었거든요. 곤충 중에 제일 관심 있는 건 달팽이예요. 달팽이는 수박을 좋아해요. 빨간 수박을
먹으면 빨간 똥을 누어요. 어제 비가 와서 잎에는 물기가 남아 있어 달팽이가 잎사귀 밑에 숨어
있을 것 같았어요. 달팽이는 축축한 곳을 좋아하거든요. 지렁이도 축축한 땅속을 좋아하고요.
호미에 하마터면 죽을 뻔한 지렁이를 땅을 파고 넣어주었어요. ‘상처가 없어 다행이야.’라고
중얼거리며 말이에요.
“더운데 어여 이리 들어오너라.”
할아버지께서 우리를 나무 그늘 모기장으로 오라고 했어요.
“할아버지, 재미난 이야기 해 주세요.”
리나가 할아버지 무릎에 올라앉으며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어요. 본이도 할아버지 다른 쪽
무릎에 올라앉았어요. 할머니가 시원한 수박을 쟁반에 담아 왔어요. 엄마 아빠 큰엄마 큰아빠도
4
모기장 속으로 들어왔어요. 숲속이라 모기가 많아 모기장 텐트를 만들어 두었어요. 하늘에는
햇빛이 쨍쨍 났어요. 숲속 나무 냄새도 참 좋았어요. 산새 소리도 ‘비비츄!’ 하고 들렸고요. 누나가
수박을 할아버지 입에 넣어드렸어요. 나도 질세라 할아버지께 수박 한쪽을 손에 잡혀 드렸고요.
“허허, 맛있구나. 너희도 많이 먹어라. 내 강아지들이 오니까 사람 사는 집 같구나.”
“할아버지, 이제 아프지 마요.”
내가 먼저 말하고 싶었는데 누나가 먼저 말했어요. 나도 할아버지가 아프지 말라고 나중에
말해야겠어요.
“그려 그려.” 할아버지 눈가가 촉촉해졌어요.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무척 흐뭇해하셨어요.
“할아버지, 빨리 이야기해 주세요.”
본이가 보챘어요.
“오냐! 이리 가까이 앉거라.”
누나와 내가 할아버지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어요.
“아까 우리하나가 지렁이를 보고 많이 놀랐지?”
“네, 할아버지. 지렁이는 징그러워요.”
“허허, 그렇지. 하지만 말이다. 너희들이 알아듣기 좀 어렵겠지만, 지렁이가 많아야 땅이
건강해지고 기름지단다. 지렁이가 먹고 배설하는 배설물에는 미생물이 많아 채소가 잘 자라거든.
그래서 화학비료나 약을 치지 않고도 채소들이 잘 자라는 게지.”
“그게 무공해 채소죠? 할아버지.”
“그렇단다. 그래서 땅이 건강해지려면 지렁이가 많아야 하고, 지렁이뿐만 아니라 작은 생명이라도
귀하게 여겨야 하는 거지.”
“할아버지, 그거 말고 재미난 이야기 해주세요.”
리나가 이야기가 재미없다고 다른 걸로 해 달라고 했어요.
“허허! 오냐.”
어느 봄날, 영국 왕궁 앞 광장 대로에서 요란하게 호루라기를 불며 한 할아버지가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단다. 할아버지 정지 동작에 모든 차량이 섰지. 사람들은 여왕님의 행차가 지나가는 줄 알고
차를 세우고 머리를 창밖으로 쑥 내밀고 구경을 했지. 왕궁 앞에는 늘 사람과 차량으로 붐비는
곳이었단다. 바쁜 사람들도 그 행렬을 구경하려고 발걸음을 멈추었지.
5
“틀림없이 여왕님이 행차하실 거야. 예쁜 공주님도 있을 거야.”
리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본이를 보며 말했어요.
“일반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만 여왕님을 뵈었지만, 사람들은 직접 본 적이 거의 없었거든. 너희가
캐나다 총리를 직접 뵙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맞아요. 할아버지.”
한참 후에 교통정리 하던 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행차가 가까이 온다고 했단다.
“세상에서 제일 귀하신 생명이 지나갑니다. 절대 환호를 하거나 소리 지르지 말고 조용히
하십시오. 그들이 놀라면 절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했단다. 잠시 후 행렬이 나타났을 때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빙그레
웃고 말았단다. 그 행렬은 여왕님의 행렬이 아니라…….
“그럼 뭐예요? 할아버지!”
본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어요.
“그것은 어미 오리가 열 마리의 아기오리를 데리고 아장아장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었어.”
“와, 귀여웠겠어요. 저도 공원 연못에서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큰 도로는 위험하잖아요. 오리들이
차에 치이면 죽을 텐데요.”
누나답게 말했어요. 누나는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 Grade 5이니까요.
“우리 하나 말이 맞네. 그렇지만 사람들이 실망했겠어요. 아버님.”
큰엄마도 이야기를 듣고는 말했어요.
“물론 바쁜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모두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지.”
“그럼 예쁜 공주님과 여왕님은 안 왔어요?”
잔뜩 기대하던 리나가 실망했어요.
“거봐, 누나 아까 그 지렁이도 죽이면 절대 안 된다고,”
“그렇지. 생명은 소중한 거지. 작은 곤충이라고 함부로 죽이면 안 되는 거란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는 가던 길을 멈추고 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많은 차량을 멈추게 했던 게지. 사람들의
발걸음도 멈추게 하고 말이다. 생명은 그만큼 소중하단다. 생물이 살지 못하는 곳은 사람도 살 수
없는 법이거든.”
6
“할아버지, 죄송해요. 아까 그 지렁이는 너무 놀라 실수로 그랬어요.”
“그래, 생명을 귀하게 여기겠다는 그 마음이 소중한 거지. 하느님은 제일 소중한 게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단다.”
“할아버지. 저 지난번에 학교에서 생물 수업 시간에 달팽이에 대해 조사하고 프레젠테이션 했어요.
선생님께서 잘했다고 칭찬했어요.”
“허허! 우리 삭이가 곤충에 관심이 많구나.”
“네 할아버지, 전 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그중에서 곤충 연구가가 1번이에요.”
“꿈이 많은 것은 참 좋은 거지.”
“그럼 우리 하나는 뭐가 되고 싶을까?”
“전 할머니처럼 작가가 되고 싶은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래, 차차 공부해가면서 나에게 뭐가 잘 맞는지 생각해 보렴.”
“누나, 우리 아까 그 지렁이한테 가보자.”
“그러자. 살아있어야 할 텐데. 미안해 지렁이야. 죽지 마.”
누나와 내가 텃밭으로 달려가자 본이와 리나도 쪼르르 따라왔어요.
“허허! 고 녀석들!”
할아버지의 하회탈 같은 웃음소리가 자작나무 숲 사이로 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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