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정원 끝부분 양쪽으로 같은 나무가 한 그루씩 자라고 있다. 이사 올 때부터 자라고 있던 나무들이다. 다른 곳은 잡풀이 많아 다 걷어내고 정원수들을 심었지만 이 나무들은 그대로 두었다. 우리 집에 있는 어느 나무보다 오래도록 이 자리를 지켜온 나무들이다. 이름도 모르는 나무지만 베어내는 것이 아까워 그대로 두었는데 생명력이 좋은 지 다른 나무들보다 자라는 속도가 빨랐다. 왕성한 성장력 빼고는 특별한 매력이 없었다. 수형이 멋지거나 예쁜 꽃을 피우지도 않고 열매가 눈에 띄거나 가을 단풍이 감탄스럽지도 않았다. 그래선지 이름을 몰라도 궁금하지 않았다.
매일 마주치는 사이인데 이름도 모르는 것은 상대방을 좀 무시했던 건지 모른다. 잘 자라는 것도 때로 성가시고 다른 나무들에 방해만 되는 듯했다. 맘에 드는 점이 없다 보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어갔다. 나무는 개의치 않고 씩씩하게 성장해갔다. 그곳에 있어야 할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베어버리려고 했던 적도 많다. 그래도 생명인데 싶어 베어내진 않고 가지를 쳐내기만 했다. 간혹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무가 있어도 되는 의미를 찾아보려고도 했다. 찾다 보니 나무가 무성해져서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막아주는 정도의 의미는 있었다.
생각해보면 매력 없다고 업신여긴 것만은 아니었다. 늘 어떤 나무인지 알고 싶어했던 것 같다. 나무에 대한 책을 읽을 때면 혹시 이 나무처럼 생긴 나무는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곤 한 것이 증거이다. 비슷하기는 해도 똑같은 나무는 없어서 정체를 밝히는 데 실패했다.
그러다가 최근 읽은 나무도감 책에서 드디어 찾았다. 무환자나뭇과 단풍나무속에 속하는, 즉 단풍나무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는 ‘신나무’였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고 산이나 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이다. 꽃과 나뭇잎의 생김새가 책의 설명과 모두 일치했다. 일반적인 단풍나무와 달리 나뭇잎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그 가운데 갈래만 길게 뻗어 있다. 가장자리에는 연한 톱니가 겹으로 있다. 꽃은 한 꽃대에 자잘한 수꽃과 암꽃이 섞여 피고 전체적인 모양이 둥그런 형태인 산방화서이다. 수피도 책의 사진과 같고 단풍이 든 모습도 같다.
모양은 특별하지 않아도 쓰임새는 좋은 나무이다. 잎과 껍질이 약재로 쓰이고 목재는 치밀하고 단단해 가구재나 공구 손잡이 등에 쓰인다. 나뭇잎과 어린 가지를 이용해 염료를 만들었는데, 진한 회색의 염료라 스님들의 법복을 염색하는 데 쓰였다고 한다. 단풍나무속 나무는 모두 수액을 약처럼 활용하는데 고로쇠나무 수액이 가장 유명하다. 그런데 요즘 이 신나무 수액이 주목을 받고 있다. 고로쇠나무 수액보다 신나무 수액이 채취량도 많고 칼륨 함량도 두 배 이상 높다고 해서다.
이름을 알고 나서 생각보다 기쁨이 컸다. 처음 만나 통성명을 하고 정식으로 사귀게 되는 느낌이다. 마음에 드는 친구와 데이트하듯 설렜다. 자주 가까이 가서 요즘 한창 달고 있는 꽃도 자세히 살펴보고 잎의 모양도 이리저리 관찰하며 만져도 보고, 전체적인 수형도 멀찍이서 새롭게 보았다. 이제까지는 한번도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어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오며 가며 늘어진 가지를 툭툭 치고 왜 이리 빨리 자라냐고 푸념도 했었는데 이젠 다정한 눈빛으로 쓰다듬으며 다닌다. 그늘이 지는 어려운 자리에서 쑥쑥 자라는 것은 훌륭하다고 칭찬도 해주었다. 아름답지도 귀하지도 않은 나무이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나무지만 소중한 느낌이 든다. 내 친구가 된 것이다.
신나무라는 이름을 알고 나서 생긴 내 마음의 변화는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무심한 듯 보여도 우리는 모두 서로를 신경 쓰며 살고 있다. 관심 없다고 말하는 것은 대상의 이해가 힘들다는 것이지 무시는 아니다. 같이 존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내를 모르고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두렵거나 혹은 무관심으로 가장하며 살아간다. 어느 순간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서로 공통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면 마음이 열리고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그 대상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이루어진다. 주위의 사람들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모르는 채로 있기보다 끊임없이 이해하고 알아가는 노력이 즐거운 인생의 열쇠인지 모른다. 나무와 관계 맺기도 어쩜 이리 사람살이와 닮았는지 놀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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