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뱀허물을 손에 쥔 아이

박정은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8-10-16 17:14

박정은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오래전 나는 딸의 친구와 가깝게 지낸 적이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노미였다. 밴쿠버에서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해 이삿짐을 막 들여놓고 있는데, 노미가 엄마의 손을 잡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사람 맞을 준비가 안 돼 당황하는 내게 그 모녀는 정원에서 꺽은 꽃 한 다발을 내밀며 간단한 환영인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은 쿠키를 만들어 찾아오고 또 다음날도, 그렇게 매일 우리 집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노미가 그 동네의 유일한 여자애였다. 남자애들만 우글우글한 골목에 우리가 두 딸을 데리고 이사를 갔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노미는 우리 딸들의 단짝 동무가 되었다. 영어가 서툰 딸들과 어찌 그리 잘 노는지 아이들 세계에선 언어도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 보였다.
    그날도 아이들은 집 안팎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아이들을 지켜보며 노미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노미에겐 20대인 두 언니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 노미는 늦둥이냐고 물었더니 입양아라고 했다. 속으로 너무 놀라며 내 눈은 얼른 노미를 쫓았다. 그런 엄청난 비밀을 불쑥 뱉다가 아이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다행히도 노미가 저 멀리 달려가는 걸 보고 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출생의 비밀을 안 이후로 난 그걸 노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했다. 노미는 우리 딸들과 나를 정말 좋아했다. 집 옆으로 숲을 따라 산책로가 있었는데, 그 길이 노미의 집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을 걷다보면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정말 특이하게도 그 바위 밑에는 기다란 뱀 한 마리와 도마뱀이 같이 살고 있었다. 노미는 그 둘을 자기가 기르는 애완동물처럼 아꼈다. 하지만 나랑 걸을 때면 뱀을 무서워하는 나를 위해 먼저 달려가 얼굴을 내밀고 있는 뱀에게 발로 바닥을 치며 안으로 들어가라고 경고를 했다. 그렇게 7살인 어린 노미에게 보호를 받으며 난 그 길을 걷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미가 하얀 뱀허물을 손바닥에 조심스레 쥐고 우리 집으로 걸어왔다. 너무 놀란 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걸 뱀귀신이라고 했다. 하얗게 힘없이 누워있지만 비를 맞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뱀귀신. 그래선지 진짜 비가 온 다음날이면 밭 옆에 누워있던 뱀허물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난 뱀보다 더 무서운 뱀허물을 항상 피해 다녔다. 그런데 한번은 철없는 동생이 그걸 주워온 적이 있었다. 그걸 본 엄마는 그대로 달려 나가 동생의 엉덩이를 매몰차게 부쳐댔고, 그 바람에 동생은 마당에 뱀허물을 떨구고 말았다. 엄마에게 목덜미가 잡혀 끌려간 동생은 열 번도 넘게 비누칠을 해가며 손을 씻어야 했다. 그리고 엄마는 마당에 떨어진 뱀허물을 삽으로 떠 집 밖 어디까지 가 버리고 왔다. 자기 배 아파 낳은 귀한 장남이 들고 와도 그 정돈데, 친딸도 아닌 노미는 더 혼나겠지 싶었다. 버리라는데도 극구 그걸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미를 그냥 혼자 보낼 수가 없었다. 덜 혼나게 어떻게든 중재를 해보자 싶어 난 딸들을 급히 불러 노미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예상외의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노미의 엄마는 뱀허물을 보자마자 활짝 웃더니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 박스를 가지고 뛰어나왔다. 그리곤 그걸 부서지지 않게 그 안에 곱게 눕혀 조심히 들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그녀의 손짓에 나도 얼결에 따라 들어갔다. 둘은 박스를 보관할 장소를 물색해 안전한 곳을 찾아 놓았다. 그리곤 차를 준비하겠다며 노미에게 집 구경을 먼저 시켜주라고 했다. 신이 난 노미는 덥석 내 손을 잡더니 집 안 여기저기로 끌고 다녔다. 정신없이 끌려 다니던 난 가족사진으로 도배가 된 거실 벽 앞에서 한 번 더 멍해지고 말았다. 가족사진 제일 아랫줄, 딱 노미가 보기 좋을 위치에 그녀의 생모와 생부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입양인 걸 이미 알고 있었어! 자기 생모가 얼마나 예쁜지를 설명하는 노미의 높아진 목소리를 들으며, 난 이번엔 노미 엄마의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혹시 그걸 듣고 노미 엄마가 상처받진 않을까? 그때 흘끗 훔쳐본 노미 엄마의 얼굴은 그런 딸이 너무 자랑스럽다는 듯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그 부드럽고 아름다운 광경 속에서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된 거라곤 단지 거기에 어울리지 못하는 내 비좁은 마음뿐!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서 있었지만, 사실 나의 작은 마음은 혼자 걱정하고 눈치보고 놀라다 뒤통수 한 대 얻어맞고 휘청이고 있었다. 그들은 노미 눈높이에 맞춰 계속 사진을 올려가며 붙여주고 있었다. 생모와 생부의 사진 밑으로 난 쭉 올라오는 못자국이 그들의 깊은 사랑을 보여줬다.
     다음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난 노미와 딸들의 손을 잡고 숲 속 오솔길로 산책을 나갔다. 자기를 키울 수 없는 생모와 생부, 성장하기 위해 자기는 여전히 보살핌과 사랑이 필요한데 부모가 그걸 못하니, 신이 그걸 대신해 줄 지금의 엄마와 아빠에게 자기를 보내줬다는 노미의 즐거운 재잘거림이 이어졌다. 그 날은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그 아이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며 걸었다. 뱀은 성장하기 위해 뱀허물을 벗는다. 사람들이 주는 틀린 정보에 현혹되지만 않는다면, 그건 결코 피해야할 뱀귀신도 그 무엇도 아닌 그저 벗어버린 비늘에 불과했다. 노미도 성장하기 위해 벗어버린 과거의 허물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이젠 한 뼘 더 자라기 위해 내가 허물을 벗을 차례가 아닌가 싶었다. 그날 아이들과 손잡고 걷던 그 오솔길에 나도 내 허물 하나를 벗어놓고 왔다. 돌아오는 길은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훨씬 가깝게 보였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일하며 생각하며 2023.10.16 (월)
  나는 흙 내음이 좋아서 농촌에 산다. 값도 안 나가는 토종사과를 가꾸며 이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자연의 아낙으로 살며 글을 쓴다.어떤 이는 이런 나를 신선이라 부러워하고 어떤 이는 못난이라 비양을 한다.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시멘트 정글속에 갇혀 마음의 고향인 흙을 그리며 사는 도시인들이고 후자는 도시로만 나가면 뼈 빠지게 일 안하고 편히 살 수 있다고 그곳을 동경하는 가난하고 순박한 내 이웃들이다.나는 그 틈에서 머리는...
반숙자
자화상 2023.10.16 (월)
어느 시절은 봄꽃처럼 환하게 웃다가 어느 시절은 슬픔을 바늘귀에 꿰어 하루를 깁고 어느 시절은 무디어진 마음 바람에 벼리며 산 이제 바람에 닳은 얼굴 반쯤 뭉그러져붉은 꽃잎 같던 입술은 어디로 가고칸나 혹은 장미꽃 빛 립스틱이라도 발라야그나마 생기 도는 얼굴 봐 줄만한 입술 위에 꽃 피워 놓고얼굴 가만 들여다보니살고살아내고살아 지기도 한 온갖 시절그래, 노래였구나꽃이었구나사랑이었구나 담담한 눈빛이 나를...
정금자
산(7) 2023.10.11 (수)
가을산은 엄청난 생명력을 지녀옅은 파아란 녹조의 빛깔의 *대추(棗)는끝내 익어 임금님의 용포를 담은 듯붉은 색을 띄워 끊임없는생성과 소멸의 혼백에게다음 세계를 염원한다 가을산은 신비한 생명력을 지녀*사신 처럼 한 톨의 씨 밤이 썩어져내세에 *밤(栗)의 열매를 열듯산아 너는 신비한 마법으로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를연결하여 영원한 생명을 띄우는구나 가을산은 유치찬란한 생명력을 지녀*오행의 조화로 황금빛 만추의...
구정동
숨고르기 2023.10.11 (수)
  누렇게 뜬 무청이 눈에 띈다. 괜히 억척을 부렸나 보다. 어제 다용도실에 놓아두고 늦은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깜박하고 반나절이나 지난 지금 생각난 것이다.  성당 후문에는 일요일에만 오는 야채 트럭이 있다. 밭에서 직접 따온 신선한 야채에 늘 마음이 끌렸지만, 오후에 약속이 있거나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기에 한 번도 사본 적은 없었다. 어제 미사를 끝내고 서둘러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미사 후 부부 동반 모임이...
민정희
아침 안개 2023.10.11 (수)
  그는 거물이야 하늘과 바다를 합방시키고 밤과 낮의 경계를 허물지 사람이 만든 구획을 지우고신의 업적조차 무화시켜 버려 논둑이며 밭고랑을 후루룩 삼키고 강물을 통째로 들이마시는 그는미처 씹지 못한 봉우리 하나 허공에 둥실 뱉어 놓기도 해그는 고단수야 숨소리도 없이 진군해 와서 오랏줄도 없이 포박해 버리거든 품어 안는 척 발을 묶는사랑법이 내가 알던 누구와 기막히게 닮았어 겹겹이 진을 치고 포위해보아도 끝내 네 안으로...
최민자
     느긋하고 넉넉한 곳에 앉아 있으니     흐르는 시간도 늦은 걸음을 걷고     너울거리는 바람도 포도 넝쿨 사이로     시간을 몰아 마실 하듯 흐르는구려      너른 하늘과 땅을 쪼개고 가른 뒤     사람을 불러모아 도시는 살아가고     갇혀 살아가는 자고 깨는 반복은     우리 등을 떠 밀어 산과 물가로 내 몬다      톱과 망치로 손은 한가 할...
조규남
비늘 2023.10.04 (수)
옆구리를 만지면안녕의 감탄어를 뱉는다물 압력과 지그재그 가르려는 저항공기를 모방한 심호흡은 늘 얼떨떨했다 짧고 굵은 생식의 모범이제대로 된 세상에서물고기가 책장을 가로지르는 방법이다하도급 체계에 익숙한 먹이사슬을요리조리 제대로 비껴가기 위해뜸한 머무름이생식의 안갯속을저녁처럼 깜박이지 눈앞과 눈 뒤에 달린 얼떨떨한 앨범 사진이랄 게술래의 눈가리개로나무에 눈 붙이고 열을 세다뒤틀린 명암만 비늘에 살짝...
김경래
올봄에 백내장 수술까지 하고 나니 릴레이 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병치레에서 비로소 벗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육십 해 동안 사용한 몸은 재정비라도 필요했는지 여러 병원을 드나들며 마치 종합병원 투어라도 하는 것처럼 그 시작은 2021년 11월 말이었다. 그날은 자정이 다 되어 가던 시각에 샤워하게 되어서 나름 평소보다 물소리와 주위에 신경을 쓰던 중이었다. 그런데 바디샴푸를 바르며 한 발을 살짝 들고 발가락을 닦으려던 순간, 그때까지 한...
예함 줄리아 헤븐 김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