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나는 한 달 전 엄청난 일을 결정해야하는 사건 앞에 섰다. 그것은 한사람의 생사를 결정해야하는 일이었다. 그 한사람이 바로 남편이었다.
교통사고로 11년이나 남의 도움으로 살아왔던 남편이 요즘 들어 배가 부르면서 공기가 가득 든 축구공마냥 딱딱할 때가 많았다. 배를 마사지하듯 만지면 언제부턴가 하지 말라며 싫어했고 등창을 막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등을 두드리는데 역시 싫어했다.
그러던 남편이 하루 저녁에는 침대에서 운동(스트레칭)을 끝낸 후 오늘은 침상에서 저녁을 먹으면 좋겠다고 간병인을 통해 전해왔다. 식사는 휠체어에 앉아 하는 것이 소화에도 도움을 주기 때문에 안 된다며 앉히기를 강요했다. 휠체어에 앉아 패밀리 룸으로 나온 남편은 평소처럼 식사 전 혈압을 제고 간단한 목운동을 했다. 그날따라 혈압이 높기는 했지만 이럴 때가 간혹 있었기에 운동을 하고 나면 내려가려니 했다. 다리를 내리고 정상인처럼 앉아 목운동을 하고나면 대부분 혈압은 내려갔다. 그런데 그 날은 웬일인지 255/125로 더 올라갔다.
척수환자는 몸이 마비되기는 했지만 이상이 생겼을 때 혈압이 오르는 증상이 있기 때문에 급히 기본적인 것을 점검했다. 소변도 잘 나오고 몸도 꼬여있는 것 같지 않았다. 급히 침대로 옮겨 몇 가지를 더 조사했으나 괜찮아보였다. 그러나 목과 머리에 땀범벅이 된 체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했다. 손발이 몹시 차서 체했나하고 손가락 끝을 땄으나 붉은 피가 나온 걸 보니 체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남편은 E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젊을 의사는 남편의 뱃속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발견했다. 서둘러 CT촬영을 했고 그 결과 위에서 장 사이 어느 부분인가가 파열되었다는 것이었다. 담당의사는 5분 내로 수술을 할 건지 말건지를 선택하라고 종용했다. 만일 수술을 안 할 경우 이틀 안에 생명을 잃는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딸이 울먹거리더니 아빠에게 먼저 물었다.
“아빠, 아빠가 지금 많이 아프세요. 위장에서 장 사이 어느 부분이 터졌데요. 지금 수술하지 않으면 가…….” 딸은 아빠를 애처롭게 처다 보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 집에 가…….” 남편은 고혈압과 고열 그리고 갑작스레 발생한 상황으로 인해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집에 가면 죽는다니까요.” 딸의 목소리는 떨렸다.
“집에 가서 죽으면 좋아 천국 가니까.” 남편은 그 와중에도 천국소망을 너무도 확연히 갖고 있었다.
“여보, 수술하면 살 수 있어요. 수술할까?” 의사 앞에서 수술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 불안한 마음에 다구치 듯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래 수술해.” 남편은 꼭 어린 아이 같았다. 의사는 이미 남편이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가족끼리 결정하라고 했다. 미국에 사는 아들과는 연락이 안 되고 앞이 캄캄했다.
딸은 아버지를 더 이상 고생키지 말고 천국에 보내드리자며 울었다. 그러나 나는 죽어가는 남편을 도저히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수술을 집도했을 때 생사확률이 반반이라고 하니 일단 수술을 시키고 싶었다. 살아있는 모습으로 아들과 만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로 기도해주시고도 쏜살같이 병원에 들이닥치신 심목사님은 내 고민을 들으시고 “권사님 마음가신대로하세요”하시며 용기를 주셨다.
의사에게 남편을 수술시키겠다고 전하자 곧 남편은 앰뷸런스로, 우리는 우리대로 RC병원을 향해 질주했다.
그 곳에서 만난 여자의사는 힘들어하며 누워있는 남편 앞에서 수술 후유증에 대해 한참을 설명했다. 그 뒤 마취과 의사가 오더니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며 또 겁난 소리를 했다. 우리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5분이 급한 상황인데 우리는 한참을 망설이며 가슴 태웠다. 딸은 엄마만 마음을 비우면 아빠가 고생하지 않으시겠냐며 나를 설득시키려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요지부동 남편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내 생각이 옳은 건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남편을 수술시켜 살려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갔다. 사색이 되어 한 쪽 구석에 앉아있는 나를 본 딸이 다가왔다. 딸은 아무 말도 못한 체 내 곁에 서 있었다. 나는 가만히 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빠를 수술시켜야겠어…….”
딸은 더 이상 반대를 못하고 내 결정을 병원 측에 알렸다. 수술이 결정되자 남편은 곧 바로 수술대기실로 옮겨졌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지만 황막한 벌판의 어둠속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 모녀는 남편의 손을 잡고 차례로 기도드렸다. 그리고 남편이 좋아하는 찬양을 조용히 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우리는 몇번인가 반복했다.
“여보, 혼자 가서 수술할 수 있지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고 지금 주님이 당신의 손을 꼭 잡고 계셔요. 알지요?” 남편은 천진한 아이마냥 고개를 끄덕이었다. 내가 대신 해줄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수술대위에 눕고 싶었다.
“여보, 사랑해요.” “아빠, 사랑해요. 힘내세요.” 남편의 침대가 수술실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 모녀는 힘없이 서 있었다.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나는 강하게 머리를 흔들며 부인했다.
2시간 걸린다는 수술은 4시간이 걸렸다. 담당 집도 의는 자기의 손을 쥐어 보이며 이만한 것을 떼어냈다고 했다. 위암 4기라한다. 그것이 모두 암 덩어리냐고 물었더니 암 덩어리 엄지손가락만 하지만 전이를 우려해 그 주변을 모두 절단하고 위는 위 아래로 꿰매어 소장을 위쪽으로 붙었다한다. 11년이나 장애자로 산 남편이 위암이라니 기가 막혔다. 그래도 남편의 수술이 잘 되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30분 후 남편을 보기 위해 회복실문을 들어섰을 때 침대에 누워있는 남편의 모습이 좀 멀리 보였다. 남편의 얼굴이 보이자 가슴이 두근거리며 기쁨이 용솟음쳤다. 의술에 놀랐고 하나님의 신비하심에 또한 감탄했다.
나는 나의 선택이 얼마나 옳았는지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남편의 생사를 결정해야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죽을힘을 다 해 생각에 몰두했다. 남편을 수술시키지 않고 하루 이틀을 함께 더 지낼 건지, 수술하다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건지……. 이 급박한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는 것은 얼음 위를 걷는 것 마냥 큰 용기가 필요했다. 수술은 50%의 위험이 따랐지만 수술하지 않아도 어차피 죽는다면 50%의 성공을 택하고 싶었다.
남편이 수술 후 살았을 때 또 시작되는 내 고생을 저울질했다면 나는 결코 남편의 수술을 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11년 전 남편이 척수환자가 되어 위기에 처했을 때 의사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미친 듯 살렸을 때는 내 인생을 남편과 나누어 살겠다는 각오로, 이번에는 함께 죽을 각오로 살렸다고 말할 수 있다.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겠다는 투철한 신념과 사랑이 선택한 일이다.
어떤 형태로던 살아있다는 건 축복이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기에 혼신을 다 해 앞으로도 남편을 지킬 것이다. 다시 남편에게 생명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남편은 수술 후 균 배양결과 위암이 아니고 헬리코박터균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 동안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겼지만 2개월 반 만에 중환자실에서 퇴원하여 지금은 서리에 있는 캐어 나이프 요양원의 메이플 하우스에서 지내고 있답니다. 그 동안 기도해주시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에게 지면을 통해 고마움을 전합니다.)
교통사고로 11년이나 남의 도움으로 살아왔던 남편이 요즘 들어 배가 부르면서 공기가 가득 든 축구공마냥 딱딱할 때가 많았다. 배를 마사지하듯 만지면 언제부턴가 하지 말라며 싫어했고 등창을 막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등을 두드리는데 역시 싫어했다.
그러던 남편이 하루 저녁에는 침대에서 운동(스트레칭)을 끝낸 후 오늘은 침상에서 저녁을 먹으면 좋겠다고 간병인을 통해 전해왔다. 식사는 휠체어에 앉아 하는 것이 소화에도 도움을 주기 때문에 안 된다며 앉히기를 강요했다. 휠체어에 앉아 패밀리 룸으로 나온 남편은 평소처럼 식사 전 혈압을 제고 간단한 목운동을 했다. 그날따라 혈압이 높기는 했지만 이럴 때가 간혹 있었기에 운동을 하고 나면 내려가려니 했다. 다리를 내리고 정상인처럼 앉아 목운동을 하고나면 대부분 혈압은 내려갔다. 그런데 그 날은 웬일인지 255/125로 더 올라갔다.
척수환자는 몸이 마비되기는 했지만 이상이 생겼을 때 혈압이 오르는 증상이 있기 때문에 급히 기본적인 것을 점검했다. 소변도 잘 나오고 몸도 꼬여있는 것 같지 않았다. 급히 침대로 옮겨 몇 가지를 더 조사했으나 괜찮아보였다. 그러나 목과 머리에 땀범벅이 된 체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했다. 손발이 몹시 차서 체했나하고 손가락 끝을 땄으나 붉은 피가 나온 걸 보니 체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남편은 E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젊을 의사는 남편의 뱃속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발견했다. 서둘러 CT촬영을 했고 그 결과 위에서 장 사이 어느 부분인가가 파열되었다는 것이었다. 담당의사는 5분 내로 수술을 할 건지 말건지를 선택하라고 종용했다. 만일 수술을 안 할 경우 이틀 안에 생명을 잃는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딸이 울먹거리더니 아빠에게 먼저 물었다.
“아빠, 아빠가 지금 많이 아프세요. 위장에서 장 사이 어느 부분이 터졌데요. 지금 수술하지 않으면 가…….” 딸은 아빠를 애처롭게 처다 보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 집에 가…….” 남편은 고혈압과 고열 그리고 갑작스레 발생한 상황으로 인해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집에 가면 죽는다니까요.” 딸의 목소리는 떨렸다.
“집에 가서 죽으면 좋아 천국 가니까.” 남편은 그 와중에도 천국소망을 너무도 확연히 갖고 있었다.
“여보, 수술하면 살 수 있어요. 수술할까?” 의사 앞에서 수술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 불안한 마음에 다구치 듯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래 수술해.” 남편은 꼭 어린 아이 같았다. 의사는 이미 남편이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가족끼리 결정하라고 했다. 미국에 사는 아들과는 연락이 안 되고 앞이 캄캄했다.
딸은 아버지를 더 이상 고생키지 말고 천국에 보내드리자며 울었다. 그러나 나는 죽어가는 남편을 도저히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수술을 집도했을 때 생사확률이 반반이라고 하니 일단 수술을 시키고 싶었다. 살아있는 모습으로 아들과 만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로 기도해주시고도 쏜살같이 병원에 들이닥치신 심목사님은 내 고민을 들으시고 “권사님 마음가신대로하세요”하시며 용기를 주셨다.
의사에게 남편을 수술시키겠다고 전하자 곧 남편은 앰뷸런스로, 우리는 우리대로 RC병원을 향해 질주했다.
그 곳에서 만난 여자의사는 힘들어하며 누워있는 남편 앞에서 수술 후유증에 대해 한참을 설명했다. 그 뒤 마취과 의사가 오더니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며 또 겁난 소리를 했다. 우리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5분이 급한 상황인데 우리는 한참을 망설이며 가슴 태웠다. 딸은 엄마만 마음을 비우면 아빠가 고생하지 않으시겠냐며 나를 설득시키려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요지부동 남편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내 생각이 옳은 건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남편을 수술시켜 살려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갔다. 사색이 되어 한 쪽 구석에 앉아있는 나를 본 딸이 다가왔다. 딸은 아무 말도 못한 체 내 곁에 서 있었다. 나는 가만히 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빠를 수술시켜야겠어…….”
딸은 더 이상 반대를 못하고 내 결정을 병원 측에 알렸다. 수술이 결정되자 남편은 곧 바로 수술대기실로 옮겨졌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지만 황막한 벌판의 어둠속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 모녀는 남편의 손을 잡고 차례로 기도드렸다. 그리고 남편이 좋아하는 찬양을 조용히 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우리는 몇번인가 반복했다.
“여보, 혼자 가서 수술할 수 있지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고 지금 주님이 당신의 손을 꼭 잡고 계셔요. 알지요?” 남편은 천진한 아이마냥 고개를 끄덕이었다. 내가 대신 해줄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수술대위에 눕고 싶었다.
“여보, 사랑해요.” “아빠, 사랑해요. 힘내세요.” 남편의 침대가 수술실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 모녀는 힘없이 서 있었다.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나는 강하게 머리를 흔들며 부인했다.
2시간 걸린다는 수술은 4시간이 걸렸다. 담당 집도 의는 자기의 손을 쥐어 보이며 이만한 것을 떼어냈다고 했다. 위암 4기라한다. 그것이 모두 암 덩어리냐고 물었더니 암 덩어리 엄지손가락만 하지만 전이를 우려해 그 주변을 모두 절단하고 위는 위 아래로 꿰매어 소장을 위쪽으로 붙었다한다. 11년이나 장애자로 산 남편이 위암이라니 기가 막혔다. 그래도 남편의 수술이 잘 되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30분 후 남편을 보기 위해 회복실문을 들어섰을 때 침대에 누워있는 남편의 모습이 좀 멀리 보였다. 남편의 얼굴이 보이자 가슴이 두근거리며 기쁨이 용솟음쳤다. 의술에 놀랐고 하나님의 신비하심에 또한 감탄했다.
나는 나의 선택이 얼마나 옳았는지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남편의 생사를 결정해야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죽을힘을 다 해 생각에 몰두했다. 남편을 수술시키지 않고 하루 이틀을 함께 더 지낼 건지, 수술하다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건지……. 이 급박한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는 것은 얼음 위를 걷는 것 마냥 큰 용기가 필요했다. 수술은 50%의 위험이 따랐지만 수술하지 않아도 어차피 죽는다면 50%의 성공을 택하고 싶었다.
남편이 수술 후 살았을 때 또 시작되는 내 고생을 저울질했다면 나는 결코 남편의 수술을 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11년 전 남편이 척수환자가 되어 위기에 처했을 때 의사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미친 듯 살렸을 때는 내 인생을 남편과 나누어 살겠다는 각오로, 이번에는 함께 죽을 각오로 살렸다고 말할 수 있다.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겠다는 투철한 신념과 사랑이 선택한 일이다.
어떤 형태로던 살아있다는 건 축복이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기에 혼신을 다 해 앞으로도 남편을 지킬 것이다. 다시 남편에게 생명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남편은 수술 후 균 배양결과 위암이 아니고 헬리코박터균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 동안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겼지만 2개월 반 만에 중환자실에서 퇴원하여 지금은 서리에 있는 캐어 나이프 요양원의 메이플 하우스에서 지내고 있답니다. 그 동안 기도해주시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에게 지면을 통해 고마움을 전합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심현숙의 다른 기사
(더보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