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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심현숙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5-02-14 10:19

한국문인협회 캐나다 밴쿠버 지부 회원작/수필
요즈음 화제인 영화 ‘국제시장’을 관람했다. 보면서 많이 울었다.

   이 영화는 6-7살 된 어린 아이가 흥남부두에서 미군군함에 오르던 중 등에 업고 있던 동생의 손을 놓쳐 잃어버리고 만다. 그  여동생을 찾으려고 배를 내려 간 아버지와 생이별한 장남의 험난한 일생을 그린 영화이다.

   1950년 남북통일을 코앞에 두고 중공군의 급습으로 미군이 흥남부두를 철수 할 때의 모습을 리얼하게 재연했다. 군함간판에서 젊은 한국인 통역관이 불쌍한 피난민들을 살려달라고 미군장군에게 끈질기게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공산당이 싫어 자유를 찾아 나선 수많은 피난민들을 살려달라는 간곡한 애원에 사령관은 배안의 군수물자 수십만톤을 버린다. 피난민 10만명을 구하려는 장군의 용단과 휴머니즘에 감격해서 울었고 전쟁으로 인한 가족들의 생이별이 슬퍼서 울었다. 그 당시 내 나이 만 세살, 피란이라야 전남 광주에서 담양 외가로 갔던 것이 다여서 흥남부두 철수 같은 대규모 피란은 역사로만 알고 있었을 뿐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 이 영화를 통하여 남의 일인 양 머리로만 상상했던 1.4후퇴 그 당시를 되새겨보며 북쪽에서 피난 온 주위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얼마나 춥고 배고프고 불안하고 외로웠을까 생각하니 그들의 삶이 너무 비참해 또 울었다.

   60-70년대 국내에서는 변변한 일자리가 없었던 그 시절 가족들을 위해 광부로 간호사로 파독 된 대한의 아들, 딸들이 너무 안쓰러워 가슴이 메었다. 지하광산에서 석탄을 캔다는 일이 얼마나 위험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깊이가 1000미터나 되는 줄은 몰랐고 간호사들이 그 곳에서 시체를 닦는 일을 했다는 것도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시대에 너무 안일하게 살았구나 싶어 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월남에 갔던가. 가족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전쟁터에서 많은 생명들이 희생되었고 불구자가 되지 않았던가. 이분들이 독일과 월남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땀 흘려 벌어드린 외화는 우리 경제의 초석이 되었고 오늘의 풍요를 있게 한 발판이 되었다.

   이 영화는 당시 시대상을 잘 나타내는 리얼 스토리이다. 나의 이야기, 또 내 이웃의 이야기가 아닌가. 그 주인공이 바로 내 남편이 될 수도 있고 내 오빠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시대를 지닌 노년기의 우리들에게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시켜준 따뜻한 작품이다. 유년시절과 20-30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내내 남편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그 당시 남편은 수송장교로 파월하여 후방에 있었으나 전쟁터에 전후방이 어디 있으며 생명의 위험을 왜 받지 않았겠는가. 그 뒤 미국회사에서 이란에 갔을 때도 차량관리직이라 편하다고 안심시켰지만 많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이제야 돌이켜본다. 그 시대의 가장이란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생도 마다 않고 이역만리 땅 끝까지라도 가던 세대가 아니었던가. 나는 영화가 끝나고 집에 오던 길로 남편에게 다가가 “당신 월남에서 고생 많이 했지요? 이란에서는 얼마나 많은 흙먼지를 마셨오? 당신 고생을 너무 몰랐나봐요” 하며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또 내게는 미안한 사람이 있다. 어릴 적 친구이다. 교직에 계시던 아버지를 따라 전남 장흥군 관산면이라는 촌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4학년이 되자 남녀합반으로 편성되었고 그 때 처음 K라는 남자아이를 보게 된 것 같다. 어데서 왔는지 갑자기 나타났다. 그 때는 그에 대해 기억이 잘 안 나나 5학년 때 그 가 반장을 했던 건 분명하다. 아마 5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평화촌(피난촌)에 살고 있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그 시골에 피난민을 이주시켜 판잣집을 지어 살게 했다. 우리는 호기심에 친구들과 피난민촌을 구경 가기도 했다. 이제 생각하니 그 친구의 자존심을 상하게나 하지 않았는지 미안하다. 초등학교졸업을 한 달 앞두고 아버지의 전근으로 친구들과 헤어졌다.

   고등학생이 되자 광주로 유학 온 어릴 적 시골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특히 K와는 친하게 지냈다. 그는 피란을 다니느라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입학을 늦게 하다 보니 우리 또래보다는 나이가 많았다. 우리는 그에게서 피난선 탔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루는 바닷가에 사는 고모 집에 심부름을 갔는데 동네가 텅텅 비어있어 해변 쪽을 보니 개미떼처럼 모여 있는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배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한다. 뭔가 위기를 느낀 어린 아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배를 향해 뛰고 있더라고 했다. 뒤에서는 총알이 날라 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모래바닥에 엎드려 총알을 피하기도 했다고. 어린 아이를 본 사람들은 배를 멈추게 했고 그들은 손짓을 하며 “아가, 빨리 와라 빨리 와라”를 외쳐댔다고 한다. 한 어른이 자기를 번쩍 안아 배에 태워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단다. 바닷가에는 많을 짐들이 나부러져 있었는데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가지고 가려던 짐들을 버렸다는 걸 자라서야 알았다고 했다. 정원 47명인 화물선에 무려 1만4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피난민들이 탔다하니 서로가 얼마나 자리를 양보하며 포개 앉았겠는가. 어려움에 처하면 단결하여 해내고 마는 우리 민족 특유의 저력이 이런 기적을 만든 셈이다.

   지금까지도 가족처럼 지내는 친구라고 말로는 하면서 생각해보니 실제 그가 어려운 시절 한 번도 도와준 적이 없다.  이제라도 한국에 가면 맛있는 식사 한 끼 대접하며 그 때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아주 늦었지만 말해야겠다.

   나는 이번 국제시장을 보고 질곡의 시대를 불굴의 의지로 살아낸 우리 민족이 자랑스럽고 그 시대를 산 우리가 하나 되는 뿌듯함을 느꼈다. 좋은 세상에 태어나 고생 모르고 자란 자식들과 손주들 세대가 이 기회에 “힘 든 세월에 태어나 힘 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기 참 다행이라 꼬” 하던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그 분들의 얼을 받들어 더 강한 후손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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