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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H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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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07-02-22 00:00

逍遙松鷄三峰間記遊
Grouse Peak 세 봉우리 사이를 소요하던 중 느낌을 적다.
 
朝上松鷄觀周圍 아침 일찍 그라우스산 주위 사방 굽어보니
貞柏淸寒煩襟開 맑은 추위 곧은 송백 이내 시름 가시누나
遙遙史丹似浮水 저 멀리 스탠리 팍 물에 뜬듯 아련한데
茫茫阡陌連天際 끝없는 시가지는 하늘 끝에 연하였네
皓雪萬岫千波聳 눈에 덮인 봉우리들 파도치듯 꿈틀대고
充壑霽景成畵態 골짜기의 개인 경치 한폭한폭 그림이네
齊物逍遙非我干 장자의 제물소요 나의 일은 아니지만
願化雷鳥盡意飛 원화노니 이내 몸은 번개새로 날아보리
 
丙戌陽十二月七日於雷鳥臺與七人坐雪痛飮之中梅軒偶吟
병술년 12월 7일 Grouse Peak, Thunderbird Ridge에서 일곱 사람과 함께 눈 위에 앉아
통쾌하게 술을 마시는 가운데 매헌은 우연히 읊다.
 
주)제물소요: 장자의 내편에 나오는 장자의 중심사상을 우화한 우주 만물 평등 사상
                    과 시공을 초월한 원대한 포부를 담은 서사시적 산문.
    번개새: 그라우스 피크 정상 후면에 있는 산봉우리의 이름이 Thunderbird Ridge
                인데 인디언 전설에서 천둥을 일으킨다는 새 이름이다. 영한사전엔
                뇌신조로 한역..나는 한시의 특성상 축약하여 뇌조(雷鳥)로 번역함

"수술하면 깨끗하게 완치될 것입니다. 아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보장합니다."
그가 이생에서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정확히 한 달 후 홀가분하게 떠났다. 우연의 일치로 그는 내가 암덩어리로 뭉쳐진 대장을 50cm나 절단한 수술을 받고 퇴원하던 날 저 세상으로 훌쩍 날아갔다. 생각하면 참으로 묘한 인연이었다. 4년 전의 일이지만 잊혀지지 않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다. 그는 당시 절망적인 말기 방광암으로 밴쿠버 종합 병원의 말기환자병동(Palliative care unit)에 계셨다. 이 병동은 회복의 가망이 단 1%도 없는 환자들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예비 영안실이나 다름 없는 곳이다. 모든 치료를 포기하고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모르핀 주사만 꽂아주는 절체절명의 침울한 장소다. 그런 절박한 상태에 처한 그가 내가 운영하는 커피숍이 바로 병원 근처에 있어 부인과 함께 그 몸을 이끌고 나를 찾아 오신 것이다. 나는 당시 대장암 3기 일보 직전이라는 선고를 받고 6개월의 피를 말리는 기다림 끝에 수술 날짜를 달포 정도 남겨 놓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절망이라 파아란 하늘이 잿빛으로 보일만치 죽음의 공포가 나를 엄습하고, 뜬금없이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이미 방광암 수술을 두 번 이상이나 받은 후 인공방광을 장착한 상태였다. 그 몹쓸 암세포가 콩팥으로 전이되어 간다는 불길한 소문을 듣고 있던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대개 암환자들은 사람 만나기를 지극히 꺼린다. 처형 날짜를 잡아놓은 사형수나 다름없으니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리 없는 것이고, 찾아온 문병객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에게 과연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임박한 죽음을 알고 있는 말기 암환자가 수술을 기다리는 또 다른 암 환자를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그것도 기동이 불편한 걸음을 이끌고 찾아왔다는 사실은 천지개벽 이후 전무후무할 이변이 아니고 무엇이랴. 내가 암에 걸린 사실을 몰랐을 당시 나는 투병중인 그의 집으로 문병을 간 적은 있었지만, 내가 암환자가 된 이후엔 너무 충격을 받아 막상 그가 입원해 있는 병실 한번 찾아가 보지 못한 나의 용렬함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미안했고 나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이렇게 태연자약할 수가 있을까. 그날이 마침 자기가 묻힐 묘자리를 계약하고 오는 길이라고 말하는 표정 속엔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함과 초연함이 진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독배를 마시기 전 이웃에 빚진 닭 한 마리 값을 갚아주라고 친구에 부탁하는 소크라테스나 다름없는 철인(哲人)의 모습이었다. 아니면 뤼순감옥에서 사형당일 '웃고 이야기하며 형장에 나아갔다'(笑語以就刑)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S' 법대를 나와 공군관제장교로 근무한 후 부산에서 모 여대 법학교수로 재직하던 중 반정부인사로 몰려 강제퇴직당한 재야지식인이자 학자이다. 총각교수로 있다가 마흔이 넘어 결혼한 요트맨으로, 부산의 사교계를 주름잡던 멋쟁이 신사였다. 이민 후 내가 여기서 서당을 열자 나보다 열 살이나 연상인데도 한학을 배우고 싶다며 기꺼이 찾아온 호학지사(好學之士)요, 선비였다. 그 나이에 교수까지 지내신 분이 나같이 천학비재한 아랫사람에게 몸을 낮추시었으니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불치하문'(不恥下問 아랫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함)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부인도 음대를 나와 음악에 깊은 조예를 가진 인텔리 부부로, 집에는 대원군 이하응이 친 난초 그림까지 소장할 만치 격조가 넘쳐흐르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와 나는 한달 간격을 두고 유명(幽明)이 엇갈렸지만, 두 달 후 다시 한번 해후할 수 있었다. 퇴원 후 한 달이 지나고 몸을 겨우 기동할 수 있어 묘소를 찾았다. 그분에게 성묘도 드리고 또한 나도 묘자리 하나 알아보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묘소를 찾아 절을 올리고 난후 나타난 묘자리 세일즈맨이 느닷없이 바로 그 옆에 빈자리가 있는데 싼값에 줄 테니 당장 사인하자고 졸랐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그 분 옆에 묻힐 생각을 하니 흐뭇한 생각마저 들었다. 유계(幽界)에서 바로 이웃하여 지낼 수 있는 것이니 귀가 번쩍 띄었다. 결국은 우리 부부가 들어갈 공간이 못되어 포기하고 말았다. 미리 묘자리를 사면 오래 산다는 미신이 생각나기도 했지만, 나도 그분처럼 훌쩍 떠날 수 있었다면 바로 옆에 누울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이 집에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후 3년이 흘러 나는 건강한 모습으로 산행을 다니지만 마음 한구석엔 그의 뒤를 따르지 못한 아쉬움 같은 것이 미련처럼 남아있다. 이 날의 산행 중 썬더버드 리지(Thunderbird ridge)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나도 전설 속에 나오는 번개새나 되어 이승과 저승을 오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공상에 한 없이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H 교수님!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저 세상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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