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대나무 앞에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7-01-29 00:00

56세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가 전남 해남 금쇄동에 은거하면서 다섯 친구를 읊었으니 오우가(五友歌)다. 모두 여섯 수로 된 연시조 오우가에서 고산은 물, 돌, 소나무, 대나무 그리고 달을 자신의 친구로 들었다. 그 중에 대나무를 노래한 부분이다.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곳기난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난다

(곧기는 누가 시켜 그러하며, 또 속은 어찌 비었는가)

뎌러코 사시(四時)예 프르니 그를 됴하 하노라

(저러고도 사철 푸르니, 내 그를 좋아하노라.)

오래 전부터 많은 묵객(墨客)의 사랑을 받기로는 대나무만한 것도 드물지 싶다. 또한 비유의 대상도 굳은 지조나 곧음과 같은, 삶의 방식이 도달하고자 하는 상위의 가치에 있는 것들이었다. 땅에 뿌리박고 사는 뭇 나무들 가운데 대나무야말로 팔자로는 상팔자, 족(族)으로는 귀족이라 하겠다. 이쯤을 가지고도 고산(孤山)에게는 성이 차질 않았던지, 아예 대나무를 더 없어도 족하다는 다섯 친구(두어라 이 다삿 밧긔 또 더하야 머엇하리)의 하나로 들여 앉혔다.

지난 해 늦가을, 우여곡절을 거쳐 이사한 새 집은 하나도 아쉽지 않을 만큼의 손바닥만한 뒤뜰을 지니고 있어 더욱 마음에 쏙 들어왔다. 줄곧 아파트에서만 지내온 까닭인지 그 손바닥만한 뒤뜰이 내게 주는 설렘은 더 할 나위 없었다. 이렇게 이사도 하기 전부터 잔뜩 눈독을 들인 뒤뜰에 불현듯 대나무를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그 뒤로는 대나무, 대나무를 입에 달고 지냈다.

평소 대나무 사랑이 그리 유별난 건 아니었지만 군더더기 없는 자태에는 호감이 있었고, 또 워낙 작은 뜰이라 한편에 대나무 몇 그루 심는 것으로 그 뜰 가꾸기에는 가장 훌륭하다 싶었다. 바람이 불면 대나무 가느다란 허리가 살짝 휘고, 댓잎끼리 서로 비비대며 내는 소리에 사르르 눈이 감기는 상상 속에 짧게 남은 이사 날마저 더디게만 다가왔다.

몇 날이 지나 드디어 커다란 트럭을 빌려다가 이삿짐을 겨우 옮겼다. 그리고 채 짐도 풀기 전인 다음다음 날, 누구 챙겨주고 보살피는 일엔 유난히 몸이 잰 친구 하나가 이사 선물이라며 뒤뜰에 대나무를 심어주었다. 아무리 대나무에 마음이 바빠도 꼬박 겨울을 나고 봄은 되어야 심겠거니 했는데, 여러 곡절을 지나 끝내 이사하게 된 것을 자신의 일보다 더 기뻐했던 그 마음 고운 친구는 대나무에도 자신이 더 바빴는지 덜컥 옮겨 심어준 것이다. 그리고 알아봤더니 겨울을 코앞에 두고 새로 심어도 괜찮다고 하더란 말도 덧붙였다.

새 집, 새 뜰, 새로 심긴 대나무가 어떤 날은 눈에 덮이고, 어떤 날은 그 속절없는 밴쿠버의 겨울 비에 젖으며 지금 한겨울을 나고 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면 지붕 위로, 작은 뜰에 심긴 대나무들에도 따사로운 볕이 내려 가뿐한 봄이 올 거다. 수 억년을 두고 반복해왔을 계절의 변화지만 하나도 진부하지 않은 감동이 새 볕을 타고 내리고, 눈부신 계절에 겨워 목이 멜 거다. 거기에 간지러운 봄비라도 내리다 그치면 겨울을 난 대나무들은 그야말로 우후죽순(雨後竹筍)의 진면목을 보이며 하루가 다르게 더욱 무성해질 거다.

나는 봄이 무르익은 날 한결 길어진 햇살을 받아 길게 드리우는 대나무 그늘에 오래도록 앉아 있을 터, 작은 뜰이 아마 꿈같을 거다. 그리고 새로 이사하기까지 내 모자람에서 비롯된 여러 곡절에도 아랑곳 않고 말없이 함께해준 고마운 사람들의 모습을 마음 깊은 곳에 새길 터, 또한 꿈같을 거다.

사람도 아닌 물, 돌, 소나무, 대나무, 그리고 달조차 더 없는 벗으로 삼은, 고산(孤山)의 고매한 사유의 세계를 짐작조차하기에도 나는 가당치 않다. 그리고 다섯이면 족하다는 그의 읊음도 내게 와서는 다섯씩이나, 가 된다. 하지만 다섯이 아니어도 봄날 뒤뜰 대나무 그늘에 앉아 떠올리는, 고맙다는 말마저 목젖에 걸리는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을 떠올리는 내게 고산인들 부러울까.

*필자 김기승은 1979년부터 극단76극장, 극단 실험극장, 환 퍼포먼스 그리고 캐나다로 이민오기 직전 PMC 프로덕션 등을 중심으로 공연계에서 활동했고 연극, 뮤지컬, 영화, 콘서트, 라디오 등 100여 편의 작품들에서 연기, 연출, 극작, 기획 등을 맡아왔습니다. 제목 '추조람경'(秋朝覽鏡)은 당(唐)나라 설직(薛稷)이 쓴 시의 제목으로, 제자(題字)는 필자가 직접 썼습니다. <편집자주>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칼 와이먼 UBC 교수
지난 200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칼 와이먼 박사가 올해 1월부터 UBC에서 일을 시작했다. 캐나다 대학 중
밴쿠버 주말여행 동호회
밴쿠버 주말여행 동호회는 여행을 좋아하는 주부 정혜정씨가 밴쿠버 근교 여행을 즐기기 위해 만든 모임이다. 네이버에 온라인 카페를 개설하고 회원들과 모임을 가진 것이 지난해 9월. 평균연령 30대, 현재 가입 회원 수 200명을 넘어섰다. 한국에서 가입한...
노숙자 문제 2007.02.08 (목)
희대의 살인마 로버트 픽튼에 대한 재판이 캐나다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점점 드러나는 잔인하고 엽기적인 범행 방법과 자신의 죄를 모르는 살인마의 소식이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49명을 살해하고 1명을 더 채워...
BC 지진발생 위험 가장 높아 작은 지진 하루 평균 4건 꼴
지난 주말 BC주 남부 해안에 강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나간 이후 지진에 대한 문의가 쏟아졌다.
과학교육혁신 위해 UBC '삼고초려' 영입 연구 뿐 아니라 교수법에도 최고로 인정
[특별인터뷰] 노벨상 수상자인 칼 와이즈 UBC 교수는 지난 200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3개월간 1500여건
밴쿠버 경찰은 최근 다운타운 지역에서 차량 도둑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운전자들에게 주의를 촉구했다. 경찰은 지난 3개월간 주차장이나 길가에 세워져 있는 차량의 유리창을 깨고 차 안에 있는 물건을 훔쳐간 사건이 무려 1500여건이나 접수됐다고 밝히고...
뉴웨스트민스터와 리치몬드를 잇는 퀸스브로우 브리지 양방향 차량 통행이 다음 주 14일과 15일 밤 12시 30분부터 새벽 4시 30분까지 임시 통제된다. 차량 통행이 통제되는 시간 동안 운전자들은 나이트 브리지나 패툴로 브리지를 이용해야 하며 퀸스브로우 지역...
올해 1%, 내년 1.3% 예상
서민들의 주거비 부담을 가중시켜 왔던 광역밴쿠버 렌트용 아파트 부족 현상이 올해는 약간 해소될 전망이다. 캐나다주택금융공사(CMHC)는 지난해 10월 0.7%까지 떨어졌던 광역밴쿠버 지역 렌트용 아파트 공실률이 올해는 1%, 내년에는 1.3%까지 올라갈 전망이라고...
청계천변을 걷다 2007.02.05 (월)
하늘을 쬐며 흐르는 청계천을 따라 걸었다. 둑 아래로 걸으며 올려
지난 주에 이어 산후풍에 걸리지 않기 위해 산모가 유의해야 할 사항에 대해 알아본다. 셋째는 정신적인 안정이다. 출산 후 신생아의 질병, 가족간의 불화, 손님 접대로 인한 스트레스로 산후풍 증상이 생긴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우울, 불안, 슬픔, 분노와 같은...
연방정치무대 도전하는 김연아씨
"왜 하필 보수당(Conservative) 후보로 나서는 겁니까?" 캐나다 정계 진출을 선언한 김연아(42, 사진)씨가 주위로부터 가장 많이 받았다는 질문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보수당이 왜 반(反) 이민자 정당으로 비춰지는지 모르겠다"며 "당의 이미지를 바꾸는 일이...
Because I Said So 2007.02.05 (월)
엄마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딸의 삶에 간섭할 수 있는 경계선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이번 주말 개봉된 로맨틱 코미디 영화 'Because I Said So'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놓고 갈등을 빚는 엄마와 세 딸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장성한 세 딸을 둔...
Flyboys- 2007.02.05 (월)
이번 주 DVD로 나온 '플라이보이(Flyboys)'는 1차 대전 당시 프랑스군 소속으로 활약했던 전설적인 미국인 비행단 '라파예트 비행단'의 이야기를 그려낸 전쟁 드라마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프랑스, 영국, 이태리 등 유럽 연합군들이 독일에 맞서 싸우고...
신년기획 / 은퇴자들이 사는 법(5) 지식을 나누고, 나누기 위해 배우며 행복을 찾는 사람 이영화 목사
일선에서 물러난 목회자들의 은퇴 후 대책이 크게 부족한 한국에서 은퇴한 목사들은 일종의 '소외계층'이라고 한다. 그러나
동상이몽 전주현    “정호야, 정호 어서 일어나거라….” 어디선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노인의 목소리에 정호는 잠에서 깨었다. 허공에 메아리쳐 들리는 어딘지 실제 같지 않은 목소리였다. 정호는 졸린 눈을 게슴츠레 뜨고 어두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불교다례 다도(茶道) 정미정씨
가치 있는 인생, 힘있는 인생을 살기위해 취미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건전한 취미는 인생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밴쿠버 시내에서 불법주차로 견인된 차량 안에서 의식을 잃은 85세 노인이 발견됐으나 병원으로 이송직후 숨졌다고 밴쿠버 시경이 5일 발표했다. 시경에 따르면 버스터 토잉사 직원이 1일 밴쿠버 동부 킹스웨이 애비뉴에서 하루 전 견인되어온 차량 차창을 닦다가...
노스밴쿠버 조례안 상정 예정
앞으로 버스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려면 정류장 지붕에서 떨어진 곳에서 비 맞을 각고를 하고 불을 붙여야 할 것 같다. 노스밴쿠버 시의회는 버스 정류장 금연 조례안을 곧 상정할 예정이다. 노스밴쿠버의 샘 쉬시터 시의원은 밴쿠버에는 연중 비가 많이 오기...
캐스캐디아 단층 진동 예상보다 빨리 멈춰
지난 주 BC주 남부 해안에 강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예보가 나왔으나 캐스캐디아 단층선의 진동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면서 발생 가능성이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BC주 시드니 소재 퍼시픽 지질학 센터의 지질학자들은 캐스캐디아 단층선의 움직임을...
막혔던 도로 5일 재개통
밴쿠버-위슬러를 연결하는 시 투 스카이 하이웨이에서 4일 오전 9시 45분경 산사태가 발생해 양방향 통행이 금지됐다가 5일 오전 해제됐다. 산사태는 호슈베이 북쪽 라이온스 베이 이전 3km구간 일부에서 발생했으며 인명 피해는 없었다. BC주 교통부는 4일...
 1481  1482  1483  1484  1485  1486  1487  1488  1489  14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