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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와의 전쟁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6-12-28 00:00

2002년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노스 밴쿠버 카필라노 대학 근처로 이민왔다. 정착의 한 과정으로 대학에서 여러 과목을 수강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우선 고등학교 영어와 역사 과목부터 시작했다. 고등학교 과목을 마치자 이번에는 대학 과목으로 격상해 도전해 보기로 했다. 카필라노 대학은 밴쿠버에서 특히 ESL 잘 가르치기로 소문난 학교이다. 그 중에서도 유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과목이 '라이팅'이었던 것 같다. 대학 과목 신청시기를 놓친 나는 확인학습차원에서 이 학교 ESL의 꽃인 '에세이 라이팅' 과목을 신청했다. '이제부터는 자기가 하라는 대로만 해야 된다'는 소개로 첫 강의를 시작한 동구권 출신의 여 강사는 원칙을 강조하며 원칙을 벗어나면 안 된다고 했다. 과제물의 종이 사이즈가 커도 안되고, 주제문(topic sentence)이 모두(冒頭)에 나와야 되는데 중간에 나와도 안되고, 첫 문장을 띄어쓰기 안 해도 안되고, 도입문장을 의문문으로 써야 하는데 감탄형으로 써도 안되고, 각 문장을 사실적 묘사형으로 써야 하는데 서술형으로 써도 안 된다고 했다. 이 클래스는 처음부터 '안 된다'로 시작해 '안 된다'로 끝났다. 그녀의 '안 된다' 정신에 입각해 착실하게 글을 쓰면 'A'이고, '문장을 쓸 때 문화적인 차이도 있으니 인정해 달라' '틀을 너무 강조하지 말고 내용에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주장하며 오기를 펴는 나와 같은 인간들에게 그녀는 'C'를 줬다.

다행히 그녀를 거치지 않고 한국에서 학사, 미국에서 석사를 마친 것을 감사하게 해준 과목이었다. 한국에서조차 나는 이런 '안 된다'식 에세이 형식을 단 한번도 접해보지 못하고 미국으로 유학 가 공부를 했다. 매번 리포트를 낼 때마다 친구나 교내 라이팅 센터의 교정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큰 불편함 없이 'pass'할 수 있었다. 만약 한국에서의 학사시절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안 된다'식 에세이 노이로제 걸렸다면 나는 자유롭게 토론하고 사고해 자신의 것을 재창조하는 대학원 이상의 공부에 실패했거나 운 좋게 졸업했더라도 C급이었을 것이다.

2년 뒤. 어린이들에게 글쓰기라는 도구를 통해 창의력과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한 워크숍을 시작하면서 많은 한국 아이와 부모들을 만날 수 있었다. 초등고등학교 시절에 캐나다 작가들의 지도와 도움을 받아 자신의 책을 쓴다는 야심만만한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하는 목적에 부합하려면, 이 워크숍에 참가하는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읽고 쓰는데 어느 정도는 익숙해야 한다는 자격조항이 있어 참가 희망 아이들의 라이팅 샘플을 우선 검토하게 됐다. 어떤 라이팅이든 제한이 없게 했더니 많은 아이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갈고 닦은 에세이들을 제출했다.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최고의 글이라고 해서 제출된 샘플들의 수준은 한마디로 '오 마이 가쉬(Oh, my gosh: 맙소사)'! '학교 유니폼을 입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또는 '비디오 게임은 좋은가 나쁜가'와 같이 '이것 아니면 저것' 식에 대한 설득형 에세이가 주류인 그들의 문장 수준은 형식에 철저히 부응했다는 것 외에 독창적인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첫째, 둘째, 셋째의 순서만 따르고 있을 뿐 정작 중요한 설득의 '묘'나 '창의적인 문제해결 능력-기발한 아이디어'에 대해선 건조한 어른식 모범답안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글쓰기 수준과 경향에 낙담한 나에게 그들의 부모들은 '30분 안에 쓰려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 논리적인 전개가 어려웠다' 'SSAT를 준비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변명하면서, '에세이를 잘 쓰는데 창의력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아니면 '창의적인 글쓰기가 학교 공부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생뚱맞은 질문을 했다.

에세이가 도대체 뭐길래? '시도하다(to attempt)'라는 불어 'essayer'에서 유래된 에세이는 작가적 관점으로 하나의 주제에 대해 간단히 서술해내는 단편(short piece)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설에 비해 길이가 짧다 뿐이지 글이 갖는 모든 요소는 다 포함하고 있다'고 현대사상의 리더 격인 영국계 미국인 작가 헉슬리는 강변한다. 에세이는 형식의 구애(혹은 구속) 정도에 따라 정형(formal)과 비정형(informal)으로 나눠지는데, 전자는 학교 에세이를 후자는 문학 에세이를 뜻하게 된다. 학교 에세이는 일관성(coherence)과 논리(logic)의 틀 안에서 설득형(Persuasive), 비교형(comparison & contrast), 구술형(narrative), 그리고 분석형(analytical) 등 다양한 형태로 나눠지는데 고등학교 시절, 특히 10학년 이후에는 이런 형식과 형태를 소개하는 수준이고 결국은 대학 이상의 교육에서 구체적으로 활용되도록 준비시키는데 주 목적이 있다.

창작의 한 형태인 에세이에서 분가한 '학교 에세이'는 최소한 '이성'과 '논리'에 눈을 뜰 고등학교 중반 이후부터 가르치도록 북미 교육제도는 권장하고 있다. 에세이에는 작가의 관점이 경험과 연리지(連理枝)해서 표출되기 때문에 아이의 성숙도와 직결된다. 이런 에세이를, 이제 겨우 코흘리개 수준을 벗어난 초딩 아이들에게, 한창 풍부한 독서와 자유로운 글 표현으로 상상과 창의의 바다를 헤엄칠 중딩 아이들에게, '하나-둘-셋'을 복창시키며 획일화된 형태로 주입한다는 것은 세상의 미래들을 '정답형 인간'으로 전락시키는 것과 진배없다. 두 살 난 아이에게 어른들이 먹는 잡곡밥을 먹이지 않는 이유처럼, 에세이도 아이들의 물리적, 정신적인 수준과 능력에 맞춰 병행시키는 것이 교육의 정도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 북미에서 150년 전부터 가르쳐 온 정규 학교 과정을 보충하는 학습으로의 에세이를 지도해야지 '선행학습'을 빌미로 어린 나이부터 에세이를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의 세계를 축소하는 무책임한 행위이다.

'모든 라이팅은 에세이로 통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런 추세에 한몫 단단히 하는 주범이 미국식 입시 제도이다. 'SSAT'에서부터 시작하는 미국의 여러 입시 도구 중 특히 토플은 미국의 아이비(IVEY)를 사모하는 세상 모든 아이들을 30분짜리 에세이에 목숨 걸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시험의 여러 측정 요소 중 유독 한국식 암기와 노하우의 덕을 못보고 있는 게 '에세이'이기에 더더욱 에세이의 중요도는 상승가를 칠 수 밖에 없고, 가능한 한 어린 나이부터 이 30분짜리 에세이에 노출시키는 게 지름길이라는 사고에 편승하는 사칭 교육자들이 우선 붙고 보자는 식으로 정답형 에세이를 강요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붙으면 또 어떤가? 북미의 대학제도가 멍청하지 않은 이상 이런 교육의 수혜자들을 환영할 리 없다. 특히 '무엇을 아는가(what to know)'의 대학시절을 간신히 통과했다 하더라도 '무엇을 생각하는가(what to think)'의 대학원 이상의 교육으로 넘어가게 되면 이런 교육의 힘은 바닥나고 그나마 대학 튜터의 도움은 물 건너간다. 그리곤 초딩 3학년 때부터 배웠던 '주입식 에세이' 교육을 후회하게 된다.

다시 헉슬리의 표현으로 돌아가자. 에세이는 자신의 관점을 단편적인 글의 형태를 빌어 시도하는 것이다. 목적에 따라 형태를 바꿀 수는 있으나 결국 문장을 구성하는 모든 아이디어와 표현방식은 '끼(personality)'와 '독특함(uniqueness)'에 근간을 두고 있다. 고등학교, 대학의 에세이 대회에서 수상한 그 어떤 에세이도 건조하거나 형식적이거나 뻔하지 않다. 독자로 하여금 눈을 못 돌리게 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주장하고 설득한다. 이렇게 재미있고 창의적이고 농축적이어야 할 에세이의 세계를 30분짜리 에세이와 맞바꿔 아이들의 미래를 저당 잡히지 말자. 아이의 수준과 나이와 능력에 맞는 글쓰기 지도가 나라를 살리고 아이를 살린다.

박준형
어린이를 위한 창의적 글쓰기 사회(Creative Writing for Children Society)설립자 겸 저자
Home: www.cwc2004.org
email: cwc2004_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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