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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몸보다 먼저 손을 늙게 한다“언니, 그냥 마트 가서 사 오면 되지. 요즘 누가 집에서 송편을 빚어요.”   추석을 앞두고 함께 송편을 만들자고 권했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송편을 사러 마트에 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모른다. ‘요즘은 그렇구나…’ 변화하는 명절 풍속을 따라갈 준비가 안 된 나는 가슴 한편이 서늘했다. 세상은 이미 변해버렸는데, 내 손만 예전의 추석을 붙잡고 있다.   결혼 후에는 차례를...
김아녜스
커피 데울 결심 2026.09.25 (금)
아내가 내려준 커피가책상 위에서 식고 있다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전화 한 통 받고스마트폰 화면 하나 넘기는 사이나의 하루도 조금씩 식었다전자레인지에 넣고30초 누른다사람 사이이만큼 여백은 어떨까뜨겁게 사랑하자는 말 대신식은 마음 조금 데워 보는 것오늘도30초만큼은 남겨 둔다데울 결심 있는 한우리, 아직 식지 않았다.
김경래
                                                                                                                                             ...
박광일
고구마 넝쿨 2026.09.23 (수)
볼품없던 고구마 하나가 물병속에 자리잡고 앉아여린 줄기를 내밀더니 높은 곳을 향해 오르고 있다  그때,아들이 둘째아이 소식을 전한다  유리창 넘어 햇살을 받아붉은빛을 띤 잎사귀들이자기들도 들었는지 덩달아 손을 흔든다  한 줄기에서 또 한 줄기 새순 하나 늦잠을 자면먼저 난 잎들이 간지럼을 태우듯그 곁을 더듬어 올라간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바람에 한꺼번에 흔들렸다가  서로 몸을...
유우영
말씀이 어눌한 자 2026.09.18 (금)
출석하는 교회의 금요 예배 시간을 통해 EM청년부 담당 목사님으로부터 인상 깊은 주제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출애굽기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가 내놓은 답은 인간적인 주저함 그 자체였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어눌한 자니이다.” 한 민족의 운명을 짊어진 지도자로...
민완기
거울 2026.09.18 (금)
참 못생겼다참 많이 늙었다넌 잘났냐넌 젊으냐웃다가       울다가       싸우다가   또 웃다가  오늘도 두 영감이 함께황혼길 간다늙었다 못생겼다서로서로 놀리며마주보고 웃으며한평생둘도 없는길벗이 되어 
임윤빈
펴둔 채 2026.09.17 (목)
정원의 테이블은 봄에 폈다. 여름 내내 펴져 있었고, 지금도 그대로 펴져 있다. 한 번도 앉지 않았다.의자는 봄에 서로를 마주 보게 돌려두었다. 마주 앉아 이야기라도 나눌 것처럼, 둘을 바짝 당겨 붙여 두었다. 여름내 그 자세 그대로, 아무도 앉지 않은 두 의자가 서로를 마주 본 채 비어 있었다.의자 위로 먼지가 앉았다. 먼지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앉는 법이 없어서, 바람이 몇 번이고 지나가고 볕이 몇 번이고 들었다 물러간 뒤에야 겨우 얇은 막을...
윤의정
즈라촉 2026.09.17 (목)
당신은 나를 본다나는 당신을 본다가벼이가만히 즈려보는촉촉한 마음그 속에 비친 나빛난다​카니나마치 작은 소녀인 양​어두운 밤반짝이는 당신검은 밀도를 밀어내며 별빛을 두른다한 줄기 빛을 건넨다나는 그 눈동자 속작은 아이​꼬레마치 별을 삼킨 아이인 양​당신의 눈그 깊이 내가 스며 있나니​*즈라촉​*즈라촉(러시아어 зрачок)는 ‘눈동자’를 가리키거나눈동자와 관련된 여러 시대의 언어의 표현이다.
하태린
사람이 사람을 피한다. 오고 가는 사람들끼리 나누던 정다운 인사는 사라졌다. 맞은 편에서 사람이 오면 ‘누가 먼저 비껴서나’ 기 싸움을 한다. 대부분 옹고집으로 뭉친 의지(?)의 한국인이 이긴다. 그러나 덩치가 검은 곰만한 사람이 전방 1미터까지 접근하면서도 비껴 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도리 없이 내가 양보한다. 그리고는 중얼거린다. 이것 봐라. 젊은 놈이 예의도...
이원배
아프리카 대자연의 푸른 초원과 그 속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온갖 야생 동물들과 그들의 사냥 장면을 지프를 타고 관찰하는 사파리 여행은 아프리카의 상징이다. 아프리카에는 남아공의 크루그, 나미비아의 에토샤, 오카방고 델타,...
정해영
푸른 달빛이 앞마당에 내려앉은 추운 겨울이에요. 턱밑에 앞발을 모은 프린스는 은별이 누나와 헤어지던 때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비행기를 타기 전 누나는 나를 꼭 껴안고 약속했었지, 우린 다시 만날 거라고.’프린스는 며칠 전부터 시골 은별이 누나 외할머니댁에서 살게 됐어요. 오래된 한옥 마루 밑에서 살아야 하는 믿지 못할 일이 시작됐지요. 함께 살게 된 바우는...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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