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 '참정권 시위'서 2030 폭발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촉발된 ‘잠실 참정권 시위’의 주축은 2030 대학생과 직장인들이다. 이들은 지난 5일부터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서울 잠실 개표소(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로 모였다. 잠실 개표소 앞에 모인 시민은 6일 오후 9시 기준 3만6000여 명까지 불어났고, 7일에도 3만8000여 명이 밤늦게까지 항의 시위를 이어갔다.
주말인 6~7일 이틀간 본지가 잠실 개표소 앞에서 만난 시민들은 “이번 시위는 이념 싸움이 아닌 국민 기본권 침해에 대한 항의” “선거관리위원회의 무능과 무책임을 그냥 넘길 수 없다”라며 분노를 쏟아냈다. 이곳에 기성 정치권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일부 정치인과 정치 성향을 띤 유튜버 등이 현장을 찾았지만 시민들의 큰 호응을 받지 못한 채 자리를 떴다.
◇2030세대 “이념·진영 문제 아냐”
잠실 개표소 앞 시위는 지난 5일부터 시작됐다.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 중단 사태가 벌어진 잠실7동 제2투표소의 투표함 2개를 경찰이 강제로 반출해 개표장으로 옮기자, 시민들이 개표소로 몰려들었다. 6일 저녁 3만6000여 명에 이어 7일 저녁에는 3만8000여 명이 개표소를 에워쌌다. 이들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항의하며 “재선거”를 외쳤다.
잠실 개표소에 모인 시민 10명 중 7명가량이 2030대로 보였다. 대학생, 직장인,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 등 다양한 청년들이 현장을 찾았다.
직장인 김모(27)씨는 1년 만에 처음으로 시위에 나왔다고 했다. 그는 작년 초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을 찬성하는 집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김씨는 “투표용지가 없어 투표를 못 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으니 바로잡아야 한다”며 “이번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을 찍었는지, 국민의힘을 찍었는지와는 무관한 문제”라고 했다. ‘좌우 이념이 아닌 국민 권리’라는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든 20대 청년은 “이번 선거는 이미 절차적 정당성을 잃었다”며 “내가 지지한 후보가 낙선한다 해도 재선거는 불가피하다”고 했다.
청년들은 선관위를 비롯한 국가 기구와 정치권에 대해 반감과 분노를 드러냈다. 직장인 최모(30)씨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불거진 직후 선관위는 즉각 투표를 중단하고 해결 방안을 찾았어야 한다”며 “선관위가 어물쩍 넘어가려 했던 모습을 보고 너무 화가 났다”고 했다. 서울 강서구에서 왔다는 이모(29)씨는 “스타벅스 ‘탱크데이’ 논란이 불거졌을 땐 사회 고위 인사들이 너도나도 분노하며 한마디씩 얹더니, 정작 민주주의의 요체인 참정권이 훼손됐는데 왜 침묵하나”라며 “제도권의 위선과 ‘내로남불’에 화가 나서 개표소를 찾았다”고 했다.
◇자발적으로 모이고 정치권과 선 긋기
잠실 개표소에 모인 사람들에게선 통상적인 집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쇄된 피켓이나 현수막을 찾기 어려웠다. 이들은 대신 필기구로 스케치북에 ‘재선거’라고 적고, 태극기를 그려 서로 나눠 들었다. 구호 제창을 유도하는 사람도, 정치인이 올라 연설하는 단상도 없었다. 시민들은 몇몇 시민이 들고 온 음료수와 간식을 나눠 먹고, 인파가 몰릴 때는 자발적으로 우측 통행을 안내했다. 일부 시민은 분리수거를 도우며 뒷정리를 했다.
상당수 시민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투표용지 부족 사태 관련 소식을 접하고 잠실 개표소에 나오게 됐다고 했다. 한 시민은 6일 오후 1시 X(옛 트위터)에 시위 상황을 알리는 글과 현장 사진을 올렸다. 그러면서 “재선거를 요구하는 이번 집회는 오직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로만 이뤄지고 있으니 많은 공유 부탁한다”고 했다. 정치 성향이 옅은 한 먹방 유튜버는 이날 인스타그램에 “집회에 동참해달라”는 글과 잠실 개표소 위치 지도를 올렸다.
캐나다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하성준(35)씨는 시민들의 안전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며 올림픽공원의 혼잡도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제작해 온라인에 공유했다. 하씨는 “6일 집회 현장에 나가 보니 인파가 너무 몰려 안전사고가 발생할까 봐 우려됐다”고 했다.
16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온 한 부부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실시간으로 관련 소식을 접하고 역사적 시위 현장을 보여주고 싶어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며 “시위가 과격해질까 걱정했는데 평화롭게 항의 목소리를 내 안심했다”고 말했다.
◇“제도에 대한 믿음 무너져”
잠실 개표소 현장은 특정 진영이나 정치인이 주도하는 시위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한 20대 참가자는 “우리는 일사불란한 지휘부가 없고 특정 세력에 대한 후원이나 지지를 요청하지도 않는다”며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연대한 것”이라고 했다. 현장 곳곳에는 ‘하나의 목소리로 뭉칠 수 있게 재선거, 애국가만 외쳐달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조직이 아니며 금전적 후원을 받지 않는다’고 적은 안내문이 걸렸다.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해 온 유튜버 전한길씨는 주말 내내 잠실 개표소에 머물렀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7일 새벽에는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현장을 찾았으나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 시위 참가자는 “정치인이 끼면 순수성이 왜곡될 위험이 커 다들 경계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의 기성 제도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터져 나온 것이라고 진단한다. ‘부모 찬스’ 논란을 부른 2019년 조국 사태, 세대 간 역차별 문제를 낳은 지난해 ‘연금 개혁’ 논란을 거치며 꿈틀거리기 시작한 청년들의 기성 제도에 대한 불신이 폭발한 것 같다는 얘기다.
이재묵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금의 2030세대는 한국이 경제 강국으로 도약하고 민주주의 체제가 공고해진 상태에서 태어난 이들”이라며 “민주주의의 요체이자 기본권인 참정권이 위협받게 되니 들고일어난 것”이라고 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청년층이 이번 사태에 관해 느낀 문제 의식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공유되면서 시위가 들불처럼 번진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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