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일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함박눈 내리듯 소리 없이 사뿐사뿐 발을 내 딛으며, 움직이듯 움직이지 않는 듯 나비의 날개 짓 처럼 하늘 하늘 어깨 춤을 추며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시다가도, “이 노래는 잘못되었어. 젊어서는 일해야지. 놀긴 뭘 놀아” 하시며 역정을 내신다. 젊어서 부터 살기 위해 놀 틈도 없이 사셨던 할아버지는 젊은 사람들의 놀이와 게으름을 이해하지 못하셨다.
쉬지 말고 놀지 말고 항상 열심히 일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할아버지.
새벽 4시 전에 일어나시어 담배 한 개피를 물고 하루를 시작하신다. 마당을 쓸고, 집 안팎을 정리하고 그리고 술 한 잔 드신다. 그리고 아침 식사 하시고 농사일을 하신다. 160센티미터도 안되는 자그마한 키에 쌀 두 가마니씩 지고 다니셨다고 하니, 쌀 한 가마니 간신히 지고 다니고 대학교 때도 할아버지와 팔씨름을 이긴 적이 없는 손주가 일하는 것을 늘 탐탁해 하지 않으셨다. 온 힘에 다해서 직업 정신으로 농사일을 하시는 할아버지와 일을 하기 싫어서 하는 척만 했던 손주의 차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너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해” 하시면서도, “공부만 잘해서는 소용없어. 농사일도 잘해야 해”라고 하시는 할아버지와 나의 간극은 본시부터 컸었던 데다가, 늘 큰 목소리로 혼내시는 할아버지를 나는 무서워서 가능하면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밖에 없었고, 놀다 가도 집에 들어갈 때는 할아버지에게 들킬까 봐 고양이가 걷듯 살금살금 다녔다.
할아버지는 매일 술을 드셨다. 기분이 좋게 흥겹게 노시다가도 화를 내시고 잔소리를 하시니, 식구들은 무서워서 피했다. 내가 어렸을 떄도 친구들과 놀면서도 눈치를 봐야 했고, 항상 몰래 그의 눈을 피해서 다녔다. 늘 불안하고 조마조마했기에, 속으로는 미워했고, 언제 돌아가시나 하고 생각도 했다. 왜 화를 내고 무섭게 하시는지 이해를 못했다. 장손인 나를 예쁘다고 해주신 적도, 칭찬도 해주신 적이 없었다.
몇 년 전 회사에서 일하다 다쳤고 통증으로 인해 치료를 받으면서 진통제를 수시로 먹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술을 마셔보니 진통제의 효과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매일 밤 조금씩 마시다가 이러다가는 중독이 될까 싶어 잠을 설치더라도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다가 문득 할아버지의 삶이 떠올랐다. 배운 것 없는 가장으로서 가족 부양의 무게를 혼자서 짊어지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고, 치열하게 살다 가신 할아버지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육체적 노동을 하루도 벗어날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술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잊게 하는 진통제였을 것이다. 그 삶의 무게가 내면적 분노를 일으켰고, 그의 삶의 자세를 닮지 않았던 가족들에게 그 분노를 과격한 톤으로 말했을 것이고, 또 떨쳐내려 해도 떨쳐낼 수 없는 가족부양의 굴레 속에서 불가피한 삶의 무게를 잠시나마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은 술이었을 것이다.
9남매 자녀를 부양해야 하는 그의 어깨 위의 짐은 늘 무거웠으리라. 게다가 큰아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서 혼자서 모든 짐을 져야 했다. 배움이 없었던 그의 생존 방식은 잠 시간을 줄이고, 육체의 에너지를 최대한으로 사용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알뜰함과 절약 정신으로 땅을 사고 집을 마련하고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당신처럼 치열하게 삶을 사는 자식들이 없다고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자식들이 답답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옛 말에 화장실은 본 채에서 멀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대개 화장실은 집 밖의 별도의 건물에 있었다. 하수 시설도 정화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시절에 화장실의 대소변으로부터 생활환경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지혜였다. 화장실이 외부에 있다 보니 불편함은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고, 화장실 가는 것은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쪼그리고 앉아야 해서 오래 앉아 있으면 발이 저릴 수도 있고, 여름에는 구더기들이 기어 다니고, 겨울 추위에 엉덩이를 내놓고 앉아 있는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런 일이었다.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은 무서워 엄마를 깨워야 했다. 밤엔 화장실가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소변은 요강을 방에 두고 해결했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환경에서 살았기에 불편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현재 화장실 수준이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세상의 변화로 인해 비교할 만한 상황들을 경험하면서 현재에 판단하는 불편함일 뿐이다.
이 재래식 화장실이 차면 비워야 한다. 역겨운 냄새도 나고, 더럽고 불결한 것이지만, 가득 찬 통을 치워야 하고, 또 화학 비료 대신 채소와 과일을 맛있게 만드는 중요한 거름이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가득찬 오물통을 지게에 매고 1 km이상 떨어진 언덕 위의 과수원까지 지고 가셨다. 나는 그 지게를 한번도 져본 적이 없지만, 물 지게 보다 훨씬 무거울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좌 우측 통이 춤을 추듯 이리 저리 흔들리며, 중심 잡기도 어려워 잘못하면 쏟아질 수도 있고, 통과 함께 넘어질 수도 있다. 참으로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아무 불평도 힘들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막걸리 한 잔 또는 소주 한잔에 그 고단함을 삼켜버리셨다.
할아버지도 누구나처럼 몸도 아프고, 일하기도 귀찮을 때가 있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파서 못하겠다”, “하기 싫으니 네가 해라”하고 자식들에게 떠넘기시지는 않았다. 워낙 강골 이시고 건강 체질이시기도 하겠지만, 당신의 짐은 당신이 날라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나도 자식들을 키우고 가족들을 부양해 살아오면서, 버겁기도 하고, 그 짐을 내려놓고 도망치고 싶은 적도 있었다. 책임감이, 장손의 역할이 때론 숨을 못 쉬게 짓누를 때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장의 책임을 어린 나이에 물려받아 벅찼었다. 할아버지가 노년에 병석에 계셔서 일도 못하시고 했지만, 돌아가시고 생긴 그 공백이 그리 클 줄은 몰랐다. 사람들이 불쾌해 하는 똥 지게를 지면서도 가족 부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할아버지. 그 삶의 무게를 견디기 버거워 술에 의존하고, 화를 주체하지 못했지만, 후손에게 만큼은 배고픔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하셨던 할아버지가 고마워지는 건 내가 철이 들어가는 걸까, 나이가 들어가는 걸까. 나는 할아버지의 치열하고 고난스런 삶을 이해한다. 그가 느꼈을 외로움을 공감한다. 이것이 나에 대한 위로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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