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J 에게,
엊그제 이민 온 것 같은데 어언 30년이 훌쩍 지나고 이제는 성숙한 디아스포라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네. 내 인생에도 황혼의 자유가 찾아온 셈일세.
자네가 보내 준 ‘황혼의 자유’ 라는 글 속에 보면 나이가 들어가면 노숙해지는 것도 있어 참 좋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글픈 일도 있다네. 오미크론이 지난 이즈음 아는 목사님의 거동이 불편한 모습을 보면서……
그렇지만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웃고 싶으면 웃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느낄 때가 되어있지 않았나 싶네. 은퇴 이후가 아니면 어찌 누릴 수 있으리. 일하기 싫으면 놀고, 놀기 싫으면 일하고, 머물기 싫으면 떠나고 떠나기 싫으면 머물고, 바람처럼 살 수 있는 이 행복한 자유가 노년이 아니면 어찌 맛보리오. 그러나 맞벌이 부부로 생활하는 딸이 바쁘니 손자 좀 봐 달라 부탁이 있으면 그것은 예외가 될 것일세.
이제 나도 계절로 치면 가을이라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고, 하루로 치면 아름다운 석양쯤에 있는데 여기서 무얼 더 바라겠는가? 그렇지만 2년간 내가 돌본 외손자 대학가는 대견스런 모습을 보는 것도 보아야 나의 기쁨의 일면이 되는 것이지.
이제 즐거워지는 나이일세. 더 나이 들기 전에 울긋불긋 봄꽃 보러 배낭 하나 둘러메고 산에도 가고, 절친들과 바다도 가보고, 옛 동아리 친구 내외와 식사도 하고, 해외여행도 같이 가고, 이것 또한 먼 곳에서 친구가 찾아온 것이 공자가 말한 군자의 한가지 즐거움이 아니던가? 아, 노년의 나들이가 참 좋아지네. 모처럼 고국을 방문하니 조카가 외삼촌 왔다고 일류호텔에서 식사도 사주고, 청평 근처 좋은 찻집도 구경시켜 주고(한옥에 옛 장독이 많은), 시루떡과 커피도 사주니 이 또한 노년의 즐거움이 아니던가? 어찌했든 멋지게 살다가 훌훌 털고 미련없이 살다 가는 것이 최상의 낙이 아니겠는가.
아, 석양의 황금빛이여, 황혼의 영광이여! 이를 위해 무슨 때가(결혼기념일, 배우자 생일날, 금혼식 등)되면 가고 싶은 곳에 떠나가야 하지 않을까?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고운 빛깔로 익어가는 홍시 같은 그런 황혼으로!
현명하고 명랑한 노인이 되라는 중국의 저명한 작가이며 수필가인 임어당이 얘기한 대로 죽으면서 “세상 구경 한번 잘했다”라고 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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