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봄이 오는 밤에

반숙자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2-05-03 11:08

반숙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밖에는 봄비가 소근거린다. 눈이 침침하여 스탠드를 밝히고 씨감자를 쪼개다가 창문을 열었다. 희미한 전광으로 세류 같은 빗줄기가 뿌우연하다. 봄비는 처녀비다. 수줍은 듯 조그맣고 고운 목소리로, 보드라운 손길로 가만가만 대지를 적시고 나무를 어루만지며 구석구석 찾아 다니고 있다. 가장 작은 풀씨까지 빼놓지 않고 먼 강남의 밀 향기 같은 봄소식을 전해준다. ​
오늘 낮에 텃밭에 춘채春菜씨를 넣었다. 삽질을 하다 보니 주먹만한 돌멩이가 발밑으로 날아와서 손으로 집으려다 깜짝 놀랐다. 그것은 돌멩이가 아니라 몰캉하게 잡히는 개구리였다.

우수 경칩이 지난 지도 꽤 여러 날 되었건마는 겁 많은 개구리는 아직도 흙을 뒤집어쓰고 늦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발기진 개구리는 꾸무럭 꾸무럭 선잠을 터는지 뒷다리를 자맥질하듯 흔들어댄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불거진 눈과 꾹 다물린 입이 왕개구리만치 크고 의젓하다. 이제 동면에서 깨어난 개구리는 생존을 위하여 도약의 자세를 취할 것이다.

후덥지근한 목장갑을 벗어놓고 흙덩이를 부수었다. 맨 살에 와 닿는 흙의 촉감은 신선하고 만만하다. 흙이 안고 있는 생명 탓인가. 이상한 활력이 용틀임을 한다.

골을 타고 상추랑 시금치, 아욱, 쑥갓 씨를 뿌리고 다독이는 손끝에 아지랑이처럼 묻어나는 3월의 양광, 눈 두는 곳마다 찬란한 봄 빛깔이다.

누가 뭐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을 계속한다. 눈깜짝할 사이에 핵무기 하나로 온 세계가 파멸한다고 으름장을 놓아도 들은 체 만 체 겨울은 봄을 잉태하고 분만한다. 이것이 진실이며 하늘의 뜻이다.

사과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봄처녀를 허밍으로 불러본다. 편안하고 행복하다. 가진 것 없어도 가득한 마음의 평화는 긍정의 빛깔 고운 생활을 피어나게 한다.

누가 씨 뿌리는 자의 소망을 알고 그들의 인종을 알며 고독한 일상을 아는가.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었다. 웬만한 추위는 마주 잡은 손길로 녹여온 농촌이지만 근래의 추위는 속수무책이었다. 사람들은 따뜻한 햇살이 그리워 양지를 찾으며 목마르게 봄이 오기를 기다려 왔다.

정월 대보름 싸한 바람 속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그 속에 간간이 들려오는 봄의 음성을 듣기 위해 성급히 들로 나갔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다. 이렇게 간절히 기다려온 봄이기에 이 봄이 더욱 찬란한 것이리라.

농부들의 손길이 바​빠지고 있다. 우리도 사과나무를 전정剪定하고 구덩이를 파서 두엄을 주어야 한다.

이제 어둑신한 토광에서 겨울을 난 씨오쟁이를 꺼내다가 실한 곡식을 종자로 골라 놓고 못자리 논으로 나가야 한다. 비닐 보온 못자리 안에서 신품종 볍씨는 다수확의 새싹을 틔우고 있다. 밤낮의 기온 차가 심할수록 물 대기에 신경을 써야 동해를 입지 않는 건강한 모를 기를 수 있는 것이다.

봄이 오는 과수원에 서면 나는 이상스레 코끝이 찡해오는 감동에 젖는다. 그것은 죽음을 이겨낸 부활의 의미여서일까.

앉은 자리에서 눈을 돌리면서 축사 뒤의 응달에서도, 돌 틈에서도 하모니카를 불어대며 새싹이 돋고 있다. 가만히 마음의 귀를 열어 놓으면 옹달샘에 새 물이 솟듯 솟아나는 생명의 찬가.

지난 겨울​ 물러 설 줄 모르는 혹한 속에서 혹시라도 어린 뿌리가 동사하지 않을까 조바심 치며 짚으로 싸매주고 덮어준 지성이 나무에 닿았는지 유목幼木은 모두 살아나서 꽃망울을 부풀리고 있다.

아직은 한 그루에 스무남은 송이쯤 달려 있는 꽃이지만 대견하기가 그지 없다.

여기 피어나는 사과꽃은 꽃이라기보다 우리의 삶의 의지요, 소망이며, 기원이다. 봄은 위대한 창조자.

끝내 운명해 버리고 말 것 같은 침묵의 대지 위에 오묘한 생명의 신비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소생의 원리, 언 것은 녹이고 갇힌 것은 풀어주며 화해의 악수를 나눈다.

그 멀고 먼 겨울의 터널을 지나 예까지 와 준 새봄을 새봄으로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쓰잘 데 없는 탐욕의 외투를 벗어 던지고 사랑의 옷으로 바꿔 입어야 한다. 그리고 봄볕처럼 따스한 시선으로 주변을 어루만지고 내가 누군가에게 돌아갈 햇볕을 도시의 거대한 빌딩처럼 차단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오후에는 밭 둘레에 호박씨와 옥수수씨도 심었다.

여름방학이 오면 천둥벌거숭이가 되고 싶어 도시의 먼지를 흠빡 쓰고 달려오는 아이들을 위해 나는 가마솥에 감자를 옥수수를 쪄내고 멍석가에 벌어지는 여름밤의 축제를 위하여 오선지 가득 모정의 소야곡을 그릴 것이다.

아직도 비는 속삭이듯 내리고 있다.

낮에 뿌린 씨앗들이 달착지근하고 녹록한 봄비를 마시고 기지개를 켤 게다.

내일은 새벽 일찍 창문을 열어놓고 봄의 왈츠를 볼륨 높여 놓은 채 밭에 나가서 감자씨를 넣어야겠다. 그리고 싱그러운 아침 햇살이 집안을 채우거든 우리들의 근사한 출발을 위하여 햇쑥 애탕국에 달래 무침을 차려 달콤한 사과주로 건배를 들리라. ​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대한민국의 근대 역사는 실로 기적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이조 말기로부터 시작된 근대화 과정에서 오랫동안 나라를 지켜왔던 유교의 풍습이 무너지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혼란의 과정을 겪어왔다.  각종 정변은 물론이고, 일제의 침략, 그리고 6.25전쟁을 통해 국민들은 큰 아픔을 겪었다. 이 시대를 잡초와 같이 살아온 우리 부모님들의 세대는 나라를 지키려 목숨을 잃었으며 전쟁 이후에는 가난속에서 가족을 지키려 온몸이 부서져라...
김유훈
결, 결, 결 2022.06.01 (수)
결缺마음에 결缺이 났다.결缺은 항아리의 한쪽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것을 표현하는 형성 문자다. 무거운 항아리를 옮기는데 필요한 손잡이가 없으니 항아리가 제구실을 못 한다는 뜻이 ‘이지러지다, 없어지다, 모자라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결점이나 부족한 것이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나름 바르게 걸어가려고 노력한 시간이 흩어진다. 어느새 결이 난 마음, 한번 이지러진 마음은 쉽게...
강은소
6월의 연가 2022.06.01 (수)
길 섶에눈부시게 피어 올린양귀비 한 송이가슴에 맺힌 한삭일 길 없어바람결에눈물 바람 하고 있는데어디선가 날아온나비 한 마리갑자기 붉은 입술에황홀한 입맞춤을 하니가녀린 허리를한껏 뒤로 제치고뒷걸음질 친다바람 탓일까기분 탓일까
유우영
인생의 이사 날 2022.05.25 (수)
인생 그것생각해 보면 아득히 먼 기찻길 같지만멀고도 가까운 외길이었다 아버지 가시고 외로운 들꽃처럼 홀로 서셨던 어머니이제 엄니 가시고 우리 모두 홀로 선 것 같았던 길도따지고 보면 외길일 뿐이었다나 또한 가고 나면 다시 못 본다는 슬픔이 조금 있을 뿐우리 그러했듯이 내 아이들도 모두 그러할 것이기에내일을 또 사는 일이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의 세 번째 큰 이사를 할 것이다부모 곁을 떠났던 출가의 이사와 고국을 떠나...
강숙려
뿌리 내리기 2022.05.25 (수)
4월이 오면 나는 봄바람이 난다. 물병과 아이폰을 챙겨 넣은 망태기를 어깨에 메고 나 만의 산책길을 향해 집을 나선다. 재작년 옮겨 심은 참나물 뿌리가 제대로 잘 자라주면 좋겠다는 바램과 설레임으로 발걸음이 빠르다. 메이플 리지 동네 듀드니 길로 올라 오다가 230 가에서 오른 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공원이 있다. 공원 옆으로 잡풀을 헤치고 어렵게 안으로 들어가면 아늑한 공간이 나온다. 마치 나를 위한 참나물 밭처럼 파란 참나물이 무리지어...
김춘희
내 향기 내기 2022.05.25 (수)
내 향기 내기- 내 삶의 봄을 기다리며 -                                                                                                                     최원현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에 은은한 향기가...
최원현
선인장 2022.05.25 (수)
거칠어도 속이야늘통통 탱글탱글​하지만수십 년 여름 내내어둠을 멀리하고태양의 뿌리만핥아온 대가갈증과 원망이라는가시 옷만 걸치게 되었다​해가 뉘엿뉘엿 기울자때를 기다려 지금그간 벼리고 벼려왔던독기 서린 침을저 푸르딩딩한 살갗에 갖다 대고깊숙이 찌르기에 이른다​깜짝 놀란하늘의왼쪽 어깻죽지붉은 피를 흘리며어둠 속에 서서히 스러져가고 있었다​황량한 사막에서내일 한 송이 꽃 피우기 위해뜨거운 기운마셔보고또...
하태린
애플파이 유감 2022.05.17 (화)
‘김석범 성도 (81세/폐암 4기/아내 김경자 권사/써리 길포드 거주)안타까운 소식을 전합니다. 김석범 성도님께서 10월 19일 (화) 12시에 소천하셨습니다. 장례 일은 확정되는 대로 업데이트하겠습니다. 슬픔 중에 있는 유가족들을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오늘 아침 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소식이다.김석범 씨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이 일주일 전 페이스톡으로 나눈 8분간의 통화였다. 그때 그는 중환자실에서 코에 산소...
권순욱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