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나는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태어나, 세 살 때쯤 되었을 때 부모님께서 서울 용산구 후암동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내가 다닐 적에는 국민학교라고 지칭했다) 후암동에서 다녔다. 그 시절에는 거주 지역에 따라 초등학교를 배정받는 것이 중요했는데 지역별로 학교 차이가 있었다. 나는 평판이 좋고 역사가 있는 삼광초등학교에 입학해 졸업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 운동회가 열리면 ‘서울의 찬가’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있으며, 마음에 드는 소녀들을 쳐다보며 설레는 마음을 가지기도 하였다. 특히 이웃집에 사는 고 씨 성이었던 동갑내기 소녀랑 손 붙잡고 다니고, 과외도 같이하고 지낸 경험이 새롭다.
내가 살던 초등학교는 후암동 막다른 골목에 있었는데, 그 시절에는 이웃들과 가까운 친척처럼 지냈고 명절이 오면 음식을 함께 나누며 즐겁게 지냈다. 동네에는 인기 있는 연예인과 유명한 축구 선수도 있었다. 나는 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후암동 60번지에 살았다. 그 집은 적산 가옥(1945년 8.15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그들이 남겨 놓고 간 일본식 주택이었다. 돗자리로 된 다다미방도 있었고 옆집의 화장실 위치나 우리 집 화장실 위치나 같은 곳에 있었고 목욕탕 시설에 큰 욕조가 있었다.
나는 방에 다락이 있는데 이불을 개어 놓는 장소였지만 다락에 올라가 숨거나 놀거나 한 기억이 난다. 대학에 재학 중에는 후암동의 영락보린원(고아원) 근처의 주택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고 졸업 후에 진명여고에서 교사로 채용되어 여고 선생님이 되었다. 몇몇 여학생들이 놀러 오기도 하고 또 여학생들은 집에 와서 서류 정리와 성적을 계산하는 일도 도와주었다.
그곳에서 결혼하자 분가했고 연희동 연립 주택에서 전세로 살게 되었다. 그런 몇 년 뒤 직장 근처 청운동에 위치한 시영 아파트에 살다가 그 집을 팔고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면서, 다시 잠시 부모님 집으로 오게 되었다. 나는 부인을 부모님 댁에 며느리로 생활하도록 하게 놓아두고, 혼자 미국 위스컨신주 밀워키에서 2년간 지내다가, 돌아와 다시 후암동 집에서 살 게 되었다.
얼마 후에는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서초동(예전에 말죽거리)으로 옮겨 살 게 되었다. 어렸을 적의 그곳은 시골이었다. 외갓집이 있는 말죽거리 분두골(현재 서울 교대 부근)로 놀러 간 적이 많았다. 봄방학에 가면 논에 들어가서 거머리가 종아리에 붙었던 징그럽던 기억이 있으며, 여름방학에 가면 집 근처 오래된 느티나무 위에서 쓰르람 쓰르람'하는 소리로 우는 매미 소리가 정겨웠다. 외할아버지가 가꾸시는 참외밭에 가서 참외도 따 먹고, 시원한 원두막에 올라가서 더위를 피하기도했다. 그리고 겨울철에는 공청이라는 곳에서 외할아버지께서 묵묵히 새끼를 꼬고 계신 것이 기억이 난다.
어머니께서 후암동 60번지 살 때 늘 화단에 꽃들을 심었다. 아마도 농촌서 자란 어머니께서 늘 자연을 동경하고 이런 꽃들을 좋아하고 즐거워하셨던 것 같다. 이 모든 외갓집의 시골 추억이 오늘날 나의 마음에 자리 잡아 도시의 아스팔트 같은 마음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내 가족은 서초동에서 10여 년 살다가 1993년에 캐나다로 이주를 했다. 처음에 정착한 곳은 캐나다의 서부 지역인 밴쿠버 아일랜드의 빅토리아시에서 20년 살았고, 현재는 밴쿠버 코퀴틀람에서 사는데 어느덧 70 고개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제 다음에 가서 살 곳은 어디일까? 내가 살아온 길 어디쯤 왔는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세월이 또 다른 곳으로 데려가리라. 오직 이를 아는 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이시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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