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화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남자들은 뇌 구조상, 스포츠 선수 이름을 기억하거나 기계 사용설명서를 판독하는 일에는 빠르지만 감정이나 상황을 짚어 내는 감각은 여자들보다 느리다고 한다. 우리 집 경우만 봐도 그렇다. 아침나절에 남편이 나를 무시하는 투로 말을 해서 기분이 상했다. 내가 온종일 굳은 표정을 짓고 있어도 그게 자기 탓인지 몰랐다. 류현진이 등판하는 야구를 즐겁게 보고, 점심도 맛있게 먹고, 낮잠도 쿨쿨 잤다. 그러다가 다 늦은 저녁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당신,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처가에 무슨 일 있어?"
어떤 말을 내뱉기 전에 세 개의 문을 통과시켜 보라고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라고 묻는 문이다. 남편이 나에게 한 말은 첫 번째 문만 통과했을 뿐, 듣는 이의 기분을 배려하지 않았다.
유난히 부부 사이가 좋은 지인에게 그 비결을 물어보았더니, 꼭 지키는 게 있다고 했다. 언제나 남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말다툼을 하더라도 자신이 먼저 남편의 마음을 풀어 준다고 했다. '귀 명창'이란 말이 생각났다. 판소리를 들으며 적절한 때에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 줌으로써 소리꾼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사람을 가리킨다. 중년 이후로는 자신의 '소리'에 자신감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이때 다정한 목소리로 '얼쑤' 하는 추임새가 들려온다면 얼마나 반갑고 힘이 날까.
상대의 말을 경청한다는 것은 그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화해를 먼저 청한다는 것은 더 넓은 가슴으로 그를 품어 보려는 몸짓이다. 그 얘기를 들으며 그녀의 반이라도 닮아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아직은 그대로다.
어느 집이고 간에 지붕이 덮여 있어서 그렇지, 지붕을 벗겨 놓으면 다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결혼이란 신열로 시작되어 오한으로 끝나기 쉬운 것. 사랑의 감정이 식어가는 속도는 대개 나이를 앞지른다.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힘은, 진심을 담아 전하는 '미안하다' 이 한 마디에서 나오지 않을까. '미·안·하·다' 이 네 글자가 반듯한 사각형 울타리가 되어 우리 가정을 지켜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과를 제때 하는 것도 어렵지만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다. 각자의 생체 리듬이 다르듯, 우리 '감정시계'의 속도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가 가라앉는 데 걸리는 시간, 오해가 풀리는 데 걸리는 시간, 상처를 극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과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원망할 일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사과를 떼어먹은 적도 많고, 사과를 기다렸지만 상대방으로부터 아무 말이 없었던 경우도 많다. 쑥스러워서,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상대방이 거절할까 봐, 굳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등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미안하다'라는 말을 '나 못났다'와 같은 의미로 생각하는지,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입을 다문다. 어쩌면 '미안하다'라는 이 말이 우리 마음의 맨 밑바닥에 넙치처럼 납작 엎드려 있어서 그 말을 끄집어 올리기가 힘든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에게는 하기 싫은 그 말이 상대방에게는 가장 간절히 듣고 싶은 말일 수 있다.
진정 어린 사과를 받고 나면 나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된다. '정말 나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을까', '굳이 그런 상황까지 갈 일이었나' 하고. 그래서 사과를 주고받은 후에 한결 돈독한 정이 생기기도 한다.
'미안하다' 그 한 마디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사람 사이에 벌어진 틈으로 그 말이 꽃잎처럼 나붓이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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