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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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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1-05-03 09:29

신순호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그 머리 귀찮지 않아?”

워낙 자주 듣던 말이라서 해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습니다.

“응, 그래도 이제 조금만 참으면 돼.”

이젠 정말 다 왔습니다. 해나가 긴 생머리를 하고 있는 이유는 비단 예뻐 보이려고 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해나는 머리카락 기부를 하기 위해 오래도록 머리를 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2년전 어느 날, 해나는 암 투병중에 방사선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친구가 놀림받는 것을 본 같은 반 아이들이 같이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퍽이나 감동을 받았지만, 해나는 왜 가발을 안 쓸까하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알고 보니 캐나다에서만 매년 천명이 넘는 어린이 암환자들이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머리카락이 없어지고, 따라서 가발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가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약 수 십 명의 머리카락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격이 많이 비싸다고 합니다. 일반 가발과는 다르게 항균처리를 해야하기 때문에 그렇다네요. 그래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기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해나는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를 마침 자를까 하던 중이었는데, 마음을 바꿔 머리카락을 기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25cm길이 이상의 머리를 기르는 동안에는 염색을 해서도 안되고 파마도 할 수 없었습니다. 머리를 감은 다음 말리기 위해서 드라이기 사용도 하지 않았습니다. 겨울에는 샤워 후 빨리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때문에 불편하기도 했고, 머리를 빗질 할 때마다 바닥에 떨어지는 긴 머리카락때문에 청소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산뜻한 단발머리를 보면 중단하고 자를까 하는 유혹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힘들게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아기 같은 민머리를 하고 있는 또래의 어린이들을 생각하면서 조금 더 참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두 번의 겨울을 보내고 드디어 봄이 돌아왔습니다. 이제 해나의 치렁치렁한 머리도 허리까지 닿아서, 머리를 잘라 기부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해나는 정성스럽게 샴푸를 하고 타월로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 말렸습니다. 그리고 자연 바람에 머리를 말리면서 한 가닥 한 가닥 곱게 빗어 내렸습니다. 향긋한 샴푸냄새를 풍기며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릿결을 자랑스럽게 한번 쓰다듬었습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한 가닥으로 질끈 동여맨 다음 엄마에게 잘라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에휴, 아쉬워서 어째?”

“아니에요. 이유가 있으니까 이만큼 길렀지 사실 너무 힘들었어요.”

“어깨에서 자를까?”

“아니 조금 더 짧게요.”

엄마는 어깨 조금 위까지 고무줄을 잡아 내린 다음 한번에 싹둑하고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잔 머리를 정리하자 깜찍하고 단정한 단발머리의 해나가 새로 태어났습니다. 거울에 비친 해나의 머리가 시원하지만 허전하고 어쩐지 낯설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해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향해 엄지를 척하고 올려 보였습니다.

“아이구, 이쁘네. 우리 해나.”

엄마는 고무줄이 묶인 채 잘린 머리다발을 소중하게 상자에 담았습니다.

 

“자, 다음 오세요.”

엄마의 말에 이번에는 아빠가 의자에 앉았습니다. 어머나, 아빠의 머리는 어깨너머 등까지 길게 자라 있었습니다. 사실은 해나가 기부를 하기 위해 머리를 기르겠다고 하자, 기특한 딸을 위해 아빠도 같이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빠가 머리를 기르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해나의 머리보다 길이가 짧았던 아빠였기에 해나가 좀 더 머리를 기르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빠도 뒷 머리를 꽁지 내려 묶고 다니는 동안 남들이 흘끔흘끔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보는 것이 쑥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어여쁜 기부를 위해 참고 머리를 기르는 해나를 위해 아빠도 함께 부끄러움과 귀찮음을 참았습니다.

“어이 시원하다.”

엄마가 아빠의 머리를 해나처럼 고무줄 위에서 자른 다음 이발기로 깔끔하게 손질해 주시자 아빠는 저절로 어깨춤이 나왔습니다. 아빠도 평생 처음으로 머리를 길게 길러본 터라 사실 특별한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엄마는 쉽지 않았을 긴 시간을 잘 견뎌준 해나와 아빠에게 함빡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소중하게 자른 머리다발을 상자에 담아 ‘Angel hair for kids’ 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아마도 해나와 아빠의 머리카락은 이름모를 어떤 어린이의 예쁜 머리카락이 될 것입니다. 누군지 모를 그 아이가 꼭 힘을 내어 건강해지기를 빌었습니다. 해나네 가족은 오래도록 두고두고 이야기할 보람있고 소중한 추억을 하나 더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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