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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가 된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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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1-02-08 08:50

신순호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생각해봐.”

갑자기 선생님은 아빠의 이름을 부르며 큰 소리로 훈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얼떨떨한 채 생각해 보니 아빠도 어릴 땐 뭐든 겁내고 느렸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제 영웅이가 뺄셈 문제를 틀려서 혼났던 것도 어쩌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아빠 때문에 긴장해서 실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아빠가 어렸을 때처럼 말입니다. 영웅이가 자기 실력을 발휘하도록 조금 더 기다려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무사히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디선가 덩치 큰 형들이 나타났습니다. 영웅이는 깜짝 놀라서 고슴도치를 얼른 뒤로 숨겼지만, 한 형이 손을 확 낚아채는 바람에 고슴도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안돼!”

영웅이는 비명을 지르며 고슴도치를 잡으려 했지만, 다른 형이 먼저 고슴도치를 냉큼 집어버렸습니다. 고슴도치가 된 아빠는 갑자기 바닥에 떨어졌다가 다시 위로 올려지자 심한 어지러움으로 그만 오줌을 지리고 말았습니다.

에이, 더러워

다시 내 팽개쳐진 아빠는 아픈 것도 아팠지만, 몹시 화가 난데다 형들에게 꽉 잡혀 있는 영웅이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온 몸의 바늘이 곤두서고 으르릉 소리가 나왔습니다.

뭐하는 짓이야. 고슴도치가 다치잖아. 이 쓸모 없는 OO!”

영웅이는 잡고 있는 형들의 손을 뿌리치며 큰 소리로 욕을 했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스스로도 깜짝 놀랐습니다.

- 아니, 영웅아,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나쁜 말을 하면 안 돼.

고슴도치가 된 아빠는 영웅이가 한 말을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다행히 성난 영웅이 뿐 아니라 바늘을 날카롭게 세운 고슴도치에 겁을 먹은 형들은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너 다친데 없어?”

영웅이는 울먹이며 달려와 고슴도치를 안았고, 아빠도 영웅이가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염려스러워 여기저기 살펴보았습니다.

미안해. 내가 지켜주지 못해서. 난 정말 하나도 쓸모 없는 애인가 봐.”

- 아니야, 영웅아. 넌 용감했어. 아빠를 지키려고 너보다 힘세고 덩치도 큰 형들한테 덤볐잖아.

영웅이는 다시 고슴도치를 안고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빠는 내가 오늘 산수시간에 앞에 나가서 문제를 잘 풀었다고 말하면 믿어주실까?”

- 당연하지. 내가 다 보았는 걸. 우리 영웅이 정말 자랑스럽다.

난 처음 하는 것은 뭐든지 겁이나. 잘 못하면 아빠한테 혼 날 것 같아서 무서워. 그러다 보니까 더 겁이 나서 잘 못해. 아빠가 화내고 소리 지르지 않고 조금만 친절하게 얘기해주시면 좋겠어. 어쩔 땐 아빠가 나를 정말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속상해.”

- 아아, 영웅아. 정말 미안해. 아빠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 느꼈던 것을 네가 똑같이 느꼈다니. 내가 정말 잘못했어. 내가 다시 사람이 된다면 다시는 너한테 화내지 않고 막말하지 않을 게. , 정말 후회된다. 내가 벌을 받아서 고슴도치가 되었나봐.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가 싫은 건 아니야. 아빠가 화를 낼 때는 무섭지만, 나하고 장난 칠 때도 많거든. 그리고 가끔 엄마 몰래 아이스크림도 사주셨어.”

- 고마워, 영웅아. 나도 너를 미워해서 화내고 소리 지른 게 아니야. 그냥, 네가 좀 더 뭐든 잘해서 아빠보다 더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제발, 다시 사람이 된다면 절대로 그러지 않을게요.

고슴도치가 된 아빠는 정말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아빠는 뭔가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아얏하고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바닥에 머리를 쿵하고 박았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고개를 들고 보니 거실이었습니다. TV는 혼자서 춤을 추고 있었고, 테이블에는 아빠가 보다만 사진첩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잔치에서 영웅이를 안고 환하게 웃고 계신 아버지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빠는 어안이 벙벙해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어제 영웅이를 야단친 다음 마음이 안 좋아서, 옛날 앨범을 꺼내 본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다 소파에서 잠이든 모양이었습니다.

꿈이었구나. 어쩜 이렇게 생생할 수가…”

얼른 영웅이방으로 달려가 보니 영웅이는 이불을 걷어 찬 채 곤히 자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이불을 잘 덮어주고 영웅이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었습니다. 어릴 때 유난히 영웅이를 예뻐 하시던 아버지가 더 이상 영웅이를 슬프게 하지 말라고 꿈에 나타나셨나 봅니다. 그렇게도 싫었던 아버지가 자주 했던 거친 말들을 자신도 모르게 계속 영웅이에게 했다는 것이 정말 후회되었습니다. 그리고 꿈속에서처럼 영웅이도 그 말들을 저도 모르게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아찔했습니다. 영웅이의 예쁜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온다는 생각을 하자 아빠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이제부턴 절대로 절대로 고운 말만 쓰자고 다짐했습니다. 다시 한 번 영웅이와 아버지의 사진을 보니 아까보다 더 환하게 아버지가 웃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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