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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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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1-01-25 08:48

반숙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어째서 섬진강이라는 단어를 입에 물면 아련한 그리움이 되는지 영문도 모르면서 겨울 섬진강을 보러 길을 떠났다. 임진강, 두만강, 남한강, 낙동강, 이름을 대보지만 섬진강만큼 살갑게 다가오는 뉴앙스는 없다. 그럴까. 김용택 시인이 섬진강에 빠져서 빼먹을 대로 빼먹은 강이건만 사람들 가슴에 신기한 기름을 불어넣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오래 전부터 그런 의문을 가슴에 품어왔다. 봄이 와서 벚꽃이 피면 화개에서 쌍계사까지 길이 온통 주차장이 된다는 뉴스를 해마다 들으며 늙기 전에 다리에 힘이 있을 가보자고 단단히 별렀다. 그러니까 섬진강 여행은 내가 죽기 전에 해야 버킷리스트의 항목가운데 하나였다. 마침 좋은 도반들이 나를 위해 여행코스를 그쪽으로 잡고 드디어 십여 벼르던 길을 떠난 것이다.

겨울 섬진강, 벚꽃도 푸르름도 없는 알몸의 강을 탐한 것은 치졸한 취미어서가 아니다. 민낯의 그를 조용히 만나고 싶어서였다. 중부 북부는 영하를 기록하는 날씨지만 아랫녘으로 달리는 차는 계기판에 찍히는 온도가 영상으로 올라온다. 날씨는 화창하고 길은 붐비지 않아 쾌적하다. 거기다가 사랑으로 뭉친 도반들의 따듯한 배려는 늙어가는 내게 살맛나는 은전을 베풀어 주고 있다. 여행은 관광도 중요하지만 보고 먹고 쉬는 삼박자가 갖춰져야 진가를 발휘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랑 가느냐는 동행이 한마음이라야 의미를 지닌다.

화개로 들어서기 전에 하동으로 틀어서 박경리 선생의 최참판댁을 둘러보았다. 토지에서 익숙하게 만난 사람들이 정말로 거기 사는 듯한 친근감으로 다가온다. 소설과 현실이 뒤엉켜 아스라해지는 섣달 그믐 저녁나절, 나는 별당 연못가에서 엄마를 찾아내라고 떼를 쓰는 서희 애기 씨를 만나고 멀찌가니 서서 안타깝게 바라보는 길상이를 만난다. 어디 그뿐인가. 월선이와 용이의 애달픈 사랑도 본다. 이상도 하지, 분명히 소설인데 나는 무대에 서서 가슴이 해오는지... 이것을 문학의 힘이라고 하는 걸까. 박경리 선생은 26년간 토지에 매달려 대하소설을 썼지만 안에 녹아 있는 세월은 우리 민족의 서럽고 부끄러운 100년의 역사였다.

재실까지 둘러보고 다시 바깥마당에 선다. 내가 최참판댁 바깥마당에 애착을 갖는 것은 섬진강 때문이다. 거기서 바라보는 섬진강은 다른 어느 곳에서 보는 보다 유장하다. 소설이 주는 비장감 때문인지 트인 평사리 들판 가운데를 유유히 흐르는 물길이 마치 월선이의 기다림 같이 길고 질펀하다. 어디는 수역이 넓어 같고 어디는 좁아 들어 개천 같은 강줄기를 따라서 상념의 노는 강심으로 간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사라진다는 또한 무엇일까. 비록 소설 속의 사람들이지만 분명 어딘가 존재했을 사람들은 지금 세상에 없다. 다만 박경리라는 소설가의 영혼을 통해서 세월이 가도 재생되는 영원성을 얻었다. 이것이 예술의 힘이어서 세상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영혼을 불태워 창작에 임하는 것은 아닌지. 작가는 가도 작품은 영생한다는 .... 숙제다.

 

겨울 섬진강은 조용해서 좋다. 강가에는 녹다 얼음이 부스럼 딱지처럼 붙어 있고 고기를 잡는 사람도 재첩을 잡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천천히 길을 가는 물길, 바쁘지 않아서 좋다. 유속이 빠르면 정신이 없다. 물길은 나더러 쉬엄쉬엄 가라 한다. 강폭은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며 인생길을 알려준다. 바닥이 드러나 모래사장이 곳에는 겨울새 서너 마리 모이를 찾고 그러다 심심해지면 물로 뛰어들어 유영을 한다. 아마도 김용택 시인이 여기다 밭을 일군 것은 바로 천연스러운 유속 때문이 아닐까. 강물처럼 느리고 약삭빠르지 못한 사람들을 사랑해서 평생을 떠나지 못하고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온통 빠르고 광내며 돌아가는데 강물은 눈치 보고 가고 싶은 대로 흐르는 . 원시성의 순수가 강가의 나무들을 키우고 우렁이를 키우고 강변 사람들의 마음을 청정하게 살찌워주는 것이 아닐까.

얼마쯤 가다 보면 심심해질라, 볼록볼록 이랑을 이룬 녹차 밭이 따라 나서고 겨울철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 숲도 한몫 끼어 사색의 여울을 넉넉하게 준다. 여기가 바로 화개장터. 차를 멈추고 들어선다. 섬진강하면 화개가 떠오르고 화개하면 따라오는 섬진강, 지명에도 인연이 있다면 천상 배필이다. 꽃이 피어나는 곳에 흐르는 , 눈을 감으면 화사한 봄밤이다.

 

나는 550 , 강을 여기저기 토막 내며 멋대로 유람한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꺾였다 풀고 울었다 웃으며 달래주는 ,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넉넉하게 누워 강변사람에게 젖을 물리는 무명수건 모성의 . · · . 나도 오늘밤 섬진강 팔을 베고 칠십 평생 고단한 , 단잠을 들고 싶다.

집에 돌아와서 카메라를 여니 온통 섬진강뿐이다. 잔잔한 물소리도 덤으로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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