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요즘 우리들은 불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듣다 보도 못했던 바이러스가 나타나 온 세상을 장악하고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나만 해도 생활이 온통 뒤바뀌어 혼란스러운 한 해를 보냈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감정의 동요를 경험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다. 불안으로 잠을 설치기도 하고 잘 안 꾸던 악몽을 꾸기도 했다. 돌발적인 변수가 많지 않던 내 인생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출렁거렸다. 외출을 삼가고 거의 집안에서만 보내서 겉으로 볼 때는 움직임이 없는 수면을 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연못 속 오리의 발처럼 매일매일 조바심 내고 불안해하며 보낸 해였다. 한 치 앞도 알기 어려운 세상에서 하루를 버티고 한 달을 견디고 어느새 한 해가 지났다.
간혹 이런저런 이유로 어린 시절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 직접적으로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는 경우도 있고 신문 기사나 책을 통해 그런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건 생각보다 작고 하찮은 순간이다. 획기적이고 드라마틱한 순간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 잠깐씩 얼굴을 내미는 그저 그런 시간들이다. 나른한 봄날의 오후에 마당에 놓인 평상에 동생들과 함께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순간들. 맑고 가벼운 푸르름이 펼쳐진 하늘과 그 위에서 맘껏 흐트러져 노니는 하얀 구름들을 근심 없이 바라보던 순간은 지상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지상의 것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은 어린 나에게 신성과 영원을 알게 해주었다. 아름다움이 있다면 신성을 품은 저 하늘일 거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학급 환경미화를 하거나 친구들과 놀다가 늦게 귀가하던 길, 근처 문방구에 가서 10원짜리 주전부리를 물고 돌아오면서 목청껏 동요를 부르던 순간도 지극한 즐거움으로 떠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가을에 어울리는 노래들이었다. 그 노래를 부르며 바라본 달의 윤곽이 지금도 선연하다. 여름날에는 가끔씩 밤이 늦은 줄도 모르고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했다. 엄마가 화가 난 목소리로 찾아와 부르면 아차 싶어 집으로 달려갈 때, 얼굴은 발갛고 숨은 가빠도 기분만은 하늘에 닿을 듯했다. 적당한 움직임과 친구들과의 유대감이 주는 건강한 기쁨이다. 그 즐거움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다.
내 세계가 집과 그 주변의 작은 마을 뿐이었을 때는 그 작은 세상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며 버스를 타는 넓은 세계로 나아갔고, 고등학교 때는 살던 곳을 떠나 서울로 이사와 더 넓은 세상을 살게 됐다. 사회에 나와서는 그보다 더 큰 세상과 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됐다. 글로벌화된 지금의 세상에서 인간은 한 나라를 넘어 전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매일 나라 안의 여러 소식은 물론 세계 구석구석의 모든 정보를 손쉽게 만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처한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일지 모른다. 내가 사는 세상이 보다 작은 세계일 때는 일상의 하찮은 일로도 행복하다. 단순히 어리기 때문에 근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나이를 먹고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는 지금도 하나의 나무, 하나의 작은 들꽃에 집중하고 바라볼 때는 불안이 없다. 지금 집중하고 있는 세계가 작으면 작을수록 인간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간적으로 작은 세계가 행복을 준다면 시간적으로도 현재가 행복의 조건이겠다. 지금 함께하는 가족과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에 만족한다면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이외의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고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는 시간이 많다면 불안이 다가오기 쉽다. 미래는 변화가 많고 예측하기 힘들어 누구에게나 불안의 요소를 많이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신경을 써야 하는 공간이 확장될수록 불안은 커진다. 시간적으로 불확실한 먼 미래를 계획하고 짐작하는 것도 인간에겐 버거운 일이다. 물론 인간은 언제나 그 어려운 일들에 도전하여 무언가를 성취해왔다. 스트레스를 견뎌가며, 불안과 두려움과 싸워가며, 더 나은 세상을 이루어가는 인간의 모습은 그래서 칭찬할 만하고 훌륭하다. 인간만이 지닌 독특한 자질이다.
다만 그 와중에 잊지 않아야 할 것이 나만의 공간에 머물 때의 지극한 행복이다. 다육식물 하나 놓인 작은 서재일 수도 있고 자주 가는 공원의 한 귀퉁이일수도 있다. 오늘날처럼 큰 세상에서는 작은 공간에 머물고 현재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작년엔 전 세계가 각각 고립되어 단절을 경험했다. 확장이 멈췄고 소통의 욕망이 좌절당했다. 기존의 팽창 관행이 멈추자 불안해한 것은 당연했지만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추상적 언사로만 여겨지던 일상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던 요상한 시간이었다. 다시 확장되고 연결될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확인하는 것은 내가 살아내는 현실과 내가 바라보는 주변의 소중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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