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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내 그리움의 진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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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0-10-14 08:55

반숙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물소리로 밤새 뒤척였다. 대관령 자연휴양림 객창에 들리는 계곡 물소리가 나그네 심정을
어르기도 하고 휘젓기도 하여 뜬눈으로 한밤을 보내고 새벽녘 에야 단잠이 들었다. 어찌

물소리를 탓하랴. 강릉이라는 말만 들어도 잠재우고 쓸어 덮었던 그리움의 올이 낱낱이
살아나는 내 천형의 한을.
 올 수필의 날 행사가 강릉에서 열린다는 통첩을 받은 날부터 내 가슴에는 그리운 얼굴들이
영상으로 지나갔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강릉 어딘 가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나는
일년이면 두세 번 강릉을 간다. 만나지 못해도 그가 숨쉬는 공기를 함께 숨쉬고 그가 있는
하늘아래 잠시나마 있고 싶어 서다.
 첫날은 어촌가 마을에 짐을 풀고 파도에 마음을 실어 차마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하고 모래사장에 그리운 이름을 수없이 쓴다. 새벽에 나가보면 이름은 간 데 없고 보고
가노라 사인이라도 한 듯 새의 발자국만 어지럽다. 물 맑고 고운 동해안, 밤새 오징어 배 불빛이
바다의 보석인양 반짝거리는 싱싱한 생명의 터전, 새벽 주문진항에 나가면 펄떡거리는 생선이
식욕을 자극하고 물비린내조차 힘센 사나이 체취처럼 느껴지는 곳, 선착장은 아무래도
육감적이다. 어떻게 한 도시가 산과 바다를 이리도 아름답게 품을 수 있으랴.
 강릉에는 산이 좋다. 우리가 하룻밤 휴식을 누린 대관령 자연휴양림의 금강송은 법력 높은
스님 같고 고고한 자태도 아름답지만 오대산 전나무 숲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숲에 들면 시원을
알 수 없는 원력에 이끌린다. 일테면 근원을 향한 물음이 도처에서 손을 내민다. 숲은 커지고
나는 작아진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나중에는 물음만 무성하고 나는 전나무 한 그루로 선다.
 월정사로 들어가는 오리 길은 그래서 나의 수련소다. 어떤 날은 등에 바랑을 진 사람을 만나고
맨손으로 걷는 스님도 만난다. 누굴 만나도 아는체하지 말아야 한다. 불문율이다. 저마다 제
몫의 일탈을 누리고 있고 화두가 있기에 그냥 나무처럼 덤덤하게 바라보면 족하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다. 동네 뒷산에 아침산책을 가면 서로 먼저 아침인사를 나누지만 여기서는
금물이다. 그것이 그리 편하고 푸근하다.
 다람쥐가 길을 가로지르며 꼬리로 인사를 하고 바람이 귀엣말로 소식을 전한다. 바람이거나
산새이거나 직언이지 간접어가 아니다. 들을 귀가 있거든 들으라 한다. 나는 어느 날 새벽 그
숲길에서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소리를 들었다.
  “지워라”
 무엇을요?
내가 되물었다.
 “인연이다”
 잊으라 해서 잊어질 인연이면 인연이 아니다. 부정해도 문신처럼 내 영혼에 박힌 상처는 세상
끝 날에야 지워질까. 그 물음 위로 방콕에서 보았던 새 공원이 한눈에 펼쳐졌다. 바로
쥬릉새공원이다. 넓은 공원에는 진기한 새들이 나무에 깃들어 노래하고 춤춘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가며 노니는 새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로 거기가 새의 천국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곳 새들은 높은 하늘을 향해 비상의 몸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원을 떠날 때 그 진실이 밝혀졌다. 공원 안에서는 볼 수 없던 아득한 하늘까지 그물로 덮여
있는 새 공원, 그러니까 그곳 새들은 아무리 높이 날고 싶어도 저들 앞에 그물망이 처져 있다는
사실을 시행착오를 통해 터득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우라는 것은 내 안에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정신적 그물을 지워버리라는 것일 터.
 그 뒤로 강릉은 잊지 못해서 찾아가는 곳이지만 지우기 위해 찾는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무상을 배웠다. 산이 높아 계곡이 깊고 계곡이 깊어 물소리 맑은 강릉, 허난설헌의 태가 묻힌
곳, 그의 빼어난 시가 생명을 부여받은 곳, 허균의 팽팽한 저항정신이 아직도 살아있는 곳.
 나는 이번 수필의 날에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그리운 얼굴들을 만났다. 수필의 길 30년에 文
情도 깊어졌는가, 어느 동기간 만나듯 가슴에 품었다. 2,3백 명의 사람을 한꺼번에 품을 수 있는
강릉시청 회의장도 좋고 비단처럼 꼼꼼하게 직조한 일정도 좋았다.  
 생각만 해도 그리움이 발진하는 강릉, 달 밝은 밤이 오거든 경포대를 찾으리라. 신사임당이
친정어머니를 그리며 시를 썼던 그곳에서 달빛을 풀어 편지를 쓰리라.  이제는 잊었으니
인연에서 벗어나 비상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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