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신록의 계절

정목일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8-03-20 08:51

정목일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우리나라 사월 중순부터 오월 중순까지 한 달쯤의 신록기(新綠期)엔 그 어떤 꽃들도 빛날 순 없다. 
색채나 빛깔에 신비, 장엄, 경이라는 왕관을 씌운다면 꽃이 아닌 신록에만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장미, 모란, 국화, 튤립 등은 화려, 우아, 매혹, 황홀이란 공주가 쓰는 관쯤이면 될 것이다. 신록은 신이 낸 빛깔이어서 스스로 햇빛을 끌어당기고 향유를 바른다. 신록은 탄생의 빛깔이다. 볼 때마다 빛깔들이 꿈틀거리고 새로워진다. 
산이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선 어디로 가나 숲을 볼 수 있다. 산엔 소나무가 가장 많지만, 수많은 나무들이 어울려 산다. 외국처럼 특정한 나무들로만 숲을 이루고 있지 않아서 봄․가을엔 색채의 향연 속에 빠지게 만든다. 수목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신록과 단풍의 색채가 다양하고 아름답기가 세계에서도 으뜸이 아닐까 한다. 
신록기의 산과 숲에선 수백의 초록이 한데 넘실거린다. 엇비슷하면서도 다른 미묘하고 섬세한 초록 빛깔들은 도대체 몇 가지나 될까. 나무들의 수효보다 많을 듯하다. 한 나무일 지라도 오래 된 잎과 새 잎의 빛깔이 다르다. 널찍한 잎, 좁직한 잎, 바늘잎의 빛깔이 서로 차이가 난다. 한 잎이라 할지라도 앞뒤의 빛깔이 사뭇 다르다. 바람에 흔들리며 잎의 빛깔들이 반짝거린다. 새들도 오래 동안 말문을 닫고 지내다 신록 속에서 새로운 말들을 주고받는다. 신록기의 산과 들은 색채로 넘쳐나는 신명, 그 자체다. 
청 단풍은 푸르무레, 전나무 구상나무는 푸르스레, 산수유 생강나무는 푸르초롬, 느티나무는 푸릇푸릇, 참나무는 푸르딩딩, 소나무는 검푸레하다. 나무들은 금방 산부(産婦)의 몸에서 생겨난 빛깔들을 띠고 있다. 순산(順産)의 빛깔이라 할까. 갓난아기처럼 젖 내음을 풍기고 피부는 햇살에 비춰 보일 듯 맑고 여리다. 보드랍고 천진스러워 볼을 대고 입 맞추고 싶다. 
초록 빛깔 속에도 강약(强弱)이 있고, 농담(濃淡)이 있다. 명암(明暗)이 있고 원근(遠近)이 있다. 나무들마다 빛깔들로 군락을 이뤄 둥글게 혹은 편편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 군락들이 뒤섞여서 녹색의 구름 밭이 되고 파도가 된다. 
신록기의 나무들을 보면 하나씩의 초록빛 분수가 되어 뿜어 오른다. 오래 동안 참았던 그리움을 맘껏 펼쳐내고 있다. 빛깔들은 하늘과 사방으로 평창하고 있다. 초록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다. 신록기의 시시각각으로 살아 움직이는 초록 빛깔을 화가는 어떻게 화폭에 담아낼 수 있을까. 변하지 않는 바위산은 잘 그려낼 수 있지만, 볼 때마다 새로워지는 신록기의 산과 들판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나무들도 있는 힘을 다하여 신록을 펼치지만, 햇빛과 바람과 기후, 천지 기운이 함께 힘을 합쳐 내는 생명의 광채를 인간의 능력으로 어떻게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수백, 수천의 미묘한 초록 빛깔들을 어떻게 채색한단 말인가. 
신록기엔 누가 천지 가득한 초록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 보지 못했던 선(線)과 색채들의 영혼을 깨워서 축복과 찬미의 신비음(紳秘音)을 내는 것일까. 나무들은 자신들의 군락마다 다른 악기들을 들고 있다. 단색(單色)이 아닌 기기묘묘하고 무한 음역의 초록 악기들이 지휘자의 손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신이 내는 오묘하고 깊은 선율이다. 황홀하고 청신한 신록의 대 오케스트라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신록기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신록을 통해서 세상은 다시 태어나고 새로워진다. 잎눈에서 초록의 빛깔들이 깨어나는 것이 깨달음이 아닐까. 
인생의 신록기는 16~25 세쯤이 아닐까 한다. 이 시기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꿈꾸는 때이다. 내 신록기는 아버지를 여의고 소년 가장이 되어 시련과 방황 속에 지나갔다. 그러나 가슴 속에 신록의 꿈만은 잃지 않았다. 
신록기엔 내 몸에서도 잎눈이 피어나서 순결한 기운이 흐르는 듯 눈이 맑아지고 마음이 푸르러진다. 잎눈에서 막 벌레처럼 기어 나온 듯 움직이는 빛깔, 탄생의 거룩한 광채, 환희로 넘치는 생기발랄의 초록을 본다 
신록이야말로 축복의 표정이요 찬미의 노래다. 꿈과 성장을 예비하는 은총의 기도이다. 우리에겐 이 신록기가 있어 마음을 순치시켜 주고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사계(四季)가 있고 산이 많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이 내리는 특별한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신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살아있음이 너무 행복하다. 신록기엔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 하늘을 향해 마음껏 가슴을 펼쳐본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낙타 세 마리 2024.03.08 (금)
박정은 / 사)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복권이 윷놀이 상품으로 걸렸다. 구정을 맞아 주유소에서 일하는 한국인 직원들과 모여 윷놀이를 하는데, 남편이 복권을 상품으로 건 거였다. 주유소에서 복권을 팔기만 했지, 난 한 번도 복권을 사본 적이 없었다. 딱히 복권에 욕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기왕에 하는 윷놀이 열심히 해보지 싶었다. 열성껏 윷을 던진 결과 결국 몇 장의 복권이 손에 들어왔고, 난 그걸...
박정은
그리움 2024.03.08 (금)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전지를 갈아 끼워도 가지 않는 손목시계처럼 그는 그렇게 그녀라는 길 위에 멈추어 있다.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이 그에게는 여전히 아프고 쓰리다. 이별의 모서리는 언제나 날카로워 돌아볼 때마다 마음이 베이지만 그녀라는 모퉁이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는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진한 눈썹, 둥근 이마, 상큼하면서도 허스키한 탄산수 음색이 생각나 아직도 심장이 쿵, 떨어져 내린다 하였다....
최민자
밤의 날개 2024.03.08 (금)
이영춘 / 캐나다 한국문협 수석고문고요가 조용히 날개를 펼칩니다팔랑이는 이파리처럼, 이파리의 날개처럼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산비둘기들이 마을로 내려옵니다내려와 잠드는 내 집 처마 끝에달빛을 비춰줍니다고요의 숨소리가 들립니다달빛도 긴 그림자의 그늘을 접고나뭇가지에 어깨를 걸치고 앉아고요가 잠든 집을 지켜줍니다 고요가 조용히 일어나 잠들려는 나를살짝 깨웁니다눈뜬 별들의 바다가 깊습니다나도 살짝...
이영춘
송년엽서 2024.03.04 (월)
1년의 폭은 365미터비껴 간 10년, 또 10년 우리 까마득히 멀어져보이지도 들리지도 눈을 감아요깊숙이 자목련 한 그루씩 심어요 먼 날자색 빛 노을 물드는 저녁 바다 이편에서바다 저편에서 목련 꽃비만후두둑 후두둑
백철현
2024년으로 끝자리 숫자 하나가 바뀌며 엄청나게 쏟아지던 카톡의 홍수가 사라질 무렵에 나는 재미있는 톡 하나를 받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새해 덕담으로 주고받는 톡이 아닌 새롭게 단장한 문인협회 산문 분과의 새 방장님이 쏘아 올린 첫 신호탄으로 그것은 푸른 용의 꿈틀거림처럼 잔잔하던 방안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린 왕자’의 여우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한다는 신세대 방장님의 기발한 인사말과 함께 산문 방 한정 초미니 백일장을...
줄리아 헤븐 김
김밥 한 줄 2024.03.04 (월)
김밥 한 줄은 말줄임표(……)간단명료하다. 설명이나 사족을 붙이지 않는다. 말의 울림이다. 침묵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 함부로 말할 수 없어 가슴 속에서만 숨 띄는 함축언어이다.김밥 한 줄은 가장 간소한 한 끼이다. 30초 만에 차려진다. 김 한 장을 펴고 밥을 담은 다음 준비해둔 당근, 부친계란, 볶은 햄, 우엉, 시금치. 단무지를 넣고 말아 올리면 된다. 은박지를 깐 접시 위에 놓인 검은 김밥 한 줄….김밥 토막들은 대열을 벗어나지 않고...
정목일
새해 소원 2024.03.04 (월)
인생은 세월 따라 흐른다천천히 지나도 지나고 보니그 세월은 순간이었다인생은 머물지 않지만지나간 시간과 함께한소중했던 순간힘 겨워했던 시간모두 추억의 공간에 곱게 새겨져내 인생의 그림자가 되었다 많이 아쉽기도 했던 기억들함께 했던 즐거움의 흔적들같이 했던 시간 속의 기쁨들때론 야속하기도 한 아픔의 그 세월여러분을 만나서 여러분과 함께해서참 멋지고 행복한 좋은 시간이었다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2024년 또 다른 나의...
나영표
습작의 고뇌 2024.02.26 (월)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다진통 끝에 나의 자궁에서 나온 글이 걸음마를 배운다안아달라고 칭얼댄다나에게 말을 걸어온다그 글에 옷을 입혀 세상 밖으로 보내본다지나가는 이들이 내 글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잘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고 뒷얘기로 쑥덕거린다한 대 때리고 도망간다내 글이 운다내 마음이 차였다자랑스럽게 내보낸 나의 글은 그 흔한 목걸이 하나 없이누군가 길거리에 내던져 버린 옷을 걸쳐 입고 있었다그 글은 시체처럼 길거리...
김영선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