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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비 마운틴을 돌면서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7-05-17 00:00

環遊本比山
버나비 마운틴을 순환하여 거닐며

朝日微茫本比山 휘부연 아침 해가 버나비산 비추는데
早春一逕苔錦斑 이른봄 산길에는 이끼카펫 아롱졌네
風恬鏡水危岸墜 거울같이 잔잔한 물 천길 절벽 박혀있어
一區勝景引詩端 한폭의 그림경치 이내 시흥 일구누나
松間緩步路轉長 솔숲 사이 걷노라니 꼬불꼬불 길은 멀고
遊目天涯雲更遠 눈을 들어 하늘 보니 구름은 더욱 머네
吾今得養乾坤惠 이내몸이 튼튼한 건 천지자연 은혜이니
天下江山在一身 천하의 모든 강산 이 한 몸이 누리누나

丁亥陽二月二十二日與二人登本那比山而有懷梅軒偶吟
정해년 양 2월 22일 두 사람과 함께 버나비 마운틴에 올라 느낀바 있어 매헌은 우연히 읊다.

필자는 캐나다 땅에 금년이면 만 32년을 살고 있으니 이곳 교민사회에서 쓰이는 시쳇말로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다. 원주민 중에서도 왕고참 원주민의 반열에 속할 것이다. 만 26세가 채 안된 75년도 8월 토론토에 떨어진 이후 무정한 세월이 흘러 나는 이제 세 딸아이를 둔 초로의 나이가 되었으니 이곳 캐나다가 제 2의 고향이라 할 만하다. 세 딸아이는 모두 토론토에서 태어났으니 그들로선 토론토가 엄연한 본적이요 관향(貫鄕)이지 한국은 족보상의 고향일 뿐이다. 75년 그 해 큰 누님의 초청으로 우리 형제는 토론토에 도착하였고, 그 후 결혼도 했고 5년 후 부모님도 초청이민 오신 후의 이민생활...춥고 배고픈 시절을 보낸 동부캐나다는 나에게 어쩔 수 없는 고향으로 강요되었다. 87년 밴쿠버로 이사온 이후 나는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토론토에서 왔다고 자기소개를 하곤 했으니 하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토론토엔 팔순의 어머님이 계시고, 아버님 묘소가 있는 곳이니 고향이라고 느끼는 것이 당연할 터이다. 이 정도가 되면 "정이 들면 고향"이라는 어느 대중 가요의 한 구절이 빈 말은 아닌 것이다.

귀성(歸省)이라는 말은 고향을 떠나 타관에 살던 사람들이 명절같은 때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의 잠자리도 살피고, 조상들 묘소도 아울러 살피는 우리 한국인들의 독특한 미풍양속이다. 추석이나 구정명절에 시작되는 거대한 민족의 대이동은 지구촌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한국인들의 원초적 본능이며, 어떤 의미에서 한국인들만이 가진 저력일 수도 있다. 한국이 도시산업화로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던 60,70년대 귀성행렬은 또 어떠했던가. 귀성전쟁이란 신조어를 만들 만큼 애틋한 망향의 열정을 불태웠던 우리들의 빛 바랜 사진같은 정경들을 기억하는가. 지지리도 못살았던 시절 선물이래야 몸에 해롭기만 하다는 설탕이나 미원 선물세트가 최고 인기였다. 설탕포나 미원봉지를 무슨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한아름 싸들고 걸어가는 그들의 목에 힘이 들어있던 우리네들의 당시 모습을 또 기억하는가. 아무리 귀성길이 지옥 같아도 고향은 우리들에겐 돌아가야만 하는 메카였던 것이다.

나에게는 가슴 아픈 귀향기가 있다. 쑥스럽고 창피한 기억이라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둔 기억이기도 하다.

이민 후 8년만인 83년 나는 그리운 고국 방문길에 올랐었다. 그 옛날처럼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김천에 내린 후 버스를 갈아타고 거창을 거쳐 지리산의 오지 안의의 산하가 시야에 들어오는 고갯마루를 넘을 때의 일이다. 낯익은 산봉우리와 버드나무 신작로길이 보이면서 나는 벌써 목구멍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었다. 읍내주차장에 내려 택시를 타고 들어간 산골 동네의 우리 집이 보이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의 잔뼈가 굵어간 옛 집이 이젠 사람 하나 살지 않는 폐가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남아있어 얼마나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나는 뒤켠으로 가서 굴뚝을 부여잡고 통곡을 터뜨리고만 대책없는 울보(?)였으니 말이다.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속에서도 동행한 작은 누님의 손수건을 흥건히 적시고 말았으니 누님으로부터 "40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물" 이란 낙인이 찍힌 채 캐나다로 돌아왔었다. 그 이후 암에 걸려 투병할 때까지 22년 동안 나는 단 한번도 한국에 나가지 않았다. 형편이 안 되어 못나간 것이 아니라 첫 귀향길의 아픈 추억도 있거니와 여기에 부모형제가 다 살고 있으니 구태여 나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뿐이다. 또한 나의 귀향욕을 반감시킨 항진제 역할은 뭐니 해도 밴쿠버 주변의 수많은 산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향은 결국 산하라는 지형지물이 고향을 의식하는 정체성의 기반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산으로 둘러싸인 대지와 그사이를 메운 하늘이라는 공간은 내가 어린 시절 최초에 가진 강력한 공간의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산을 오르며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달래는 카타르시스를 얻고, 그 옛날 산에서 나무하고 소 먹이며 풀 베던 기억의 불씨를 쉽사리 되살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는 다른 민족들보다 산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론토는 산이라곤 눈을 씻어도 찾아 볼 수 없는 구릉지대에 불과하다.

나는 밴쿠버에 이사온 이후 거의 매년 한번씩 토론토의 귀성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장남인 나대신 동생과 큰 누님이 독거아파트에 사시는 어머님을 보살피고 있어 미안해서였다. 그러던 내가 암에 걸린 후 문제가 생긴 것이다. 차마 나의 불길한 소식을 팔순 후반의 어머님께 알릴 수 없어 이 핑계 저 핑계로 둘러대다가 지난 2월 중순 구정을 기해 4년 만에 토론토로 날아갔다. 시장에 들러 제수용품을 한 보따리 싸들고 비행기에 올랐으니 그 옛날 귀성분위기에 못지 않았다. 토론토 공항에 내리자 체감온도 영하 32도의 혹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효막심한 나를 준엄하게 꾸짖는 듯하여 정신이 버쩍 들었다. 아파트 문을 두들기자 맨발로 뛰쳐나오신 어머님을 나는 와락 끌어안았고 우리 모자는 4년만의 극적인 상봉을 했다. 이번엔 울지 않았다. 그리고 설날 모처럼 우리 형제가 어머님 앞에서 차례를 지냈다. 어머니로부터 지난 4년 나를 위해 매일 새벽 묵주기도 50단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쳐왔다는 얘길 들었으며, 이튿날 혹한 속의 눈 위에서 아버님 묘소에 큰 절을 올렸다.

나는 4년 동안의 불효에 대한 용서를 비는 큰절을 어머님께 올리고 밴쿠버로 돌아오는 또 하나의 귀향길에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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