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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遼東)의 흰 돼지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7-05-28 00:00

잠자리에 드는 시간의 기복이 심하다. 하긴 나에게 있어 기복이 심한 건 잠자리에 드는 시간뿐 아니라, 흡연량, 주량, 작업량, 기분의 상승 및 침체의 정도에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긍정적, 부정적 각도를 심하게 넘나드는 데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다. 또한 내 심한 기복 안에서는 인생의 의미조차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에서 순식간에 절망만이 존재하는 깊은 암흑의 세계로 추락하기도 한다. 극과 극을 찰나에 오가는 나는 때때로 숨차다.

얼마 전, 지긋지긋하게 잠 안 오던 어느 밤이다. 옅은 새벽 쪽빛이 흰 커튼 끄트머리부터 찬찬히 물들어 올 때까지, 기복 심한 내 취침시간은 마냥 밀려나고 있었다. 나는 기복의 흐름을 거역하려 애쓰지 않았다. 차라리 내 그림들, 글들, 그리고 이런저런 잡다한 내 흔적들과 함께 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점점 나를 숨길 영원한 어둠만이 이 땅에 남기를 고대하며 부끄러움에 홀로 떨었음을 숨길 수 없다.

심한 기복의 연장선에서 나는 나의 작업량 자체가 주는 단순한 포만감에 빠져드는 때가 있다. 그러한 것들은 때로 영문 모를 자만심으로 번져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날 밤은 부끄러움만이 나를 휘감았고, 그것의 실체는 사람내의 실종에 있었다.

애초에 음풍농월(吟風弄月)은 마음에 두지도 않았고, 시인이며 화가이기에는 아예 진절머리를 쳤다. 다만 살가운 사람의 냄새가, 그 애달파서 더욱 고운 사람의 모습이 담기길 염원했었다. 나의 모든 작업의 본령은 휘황찬란하게 장식된 것이 아닌, 소박하지만 따스한 생명력이 넘실대는 것에 있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당최 잠들지 못하던 그 밤, 잡다한 내 흔적들에서는 사람의 어떠한 내도 풍기지 않았고 따라서 아무런 온기도 느낄 수 없었다. 가슴을 열어 사람을 보듬어야 사람을 담을 수 있고, 귀를 열어 사람을 듣는 것에서 사람에 빠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내 흔적들은 오히려 오만을 담고 있었고, 치장은 가식이 넘쳐나서 소스라쳤다.

감정상태의 심한 기복이 불러온 일시적인 현상이라 돌리기엔 내 절망이 컸다. 앞으로도 나는 또 쓰고, 그릴 것이 뻔하다. 그러나 그 안에 사람이 없으면 나는 얼마 전과 같은 지치는 밤을 두고두고 지내야 한다. 그러면서도 또 쓰고 그릴 것이다. 그런 가운데 또다시 절망하며 목 조이는 날들의 반복은 처참할 것이다.

무엇은 버리고, 무엇은 담아야 하나. 무어에 더 큰 미련이 남아 훌훌 비우지 못하고 이리 뒤척이나. 혼자 부끄러움에 떠는 날들이 얼마나 더해야 오만과 가식의 두터운 각질을 다 떨구고 온기 가득한 사람의 눈물 겨운 맨 살을 보듬을 텐가.

요동(遼東)의 촌구석에서 돼지를 치는 이가 흰 돼지를 보았다. 검정 돼지새끼들 사이에서 꼼지락거리는 흰 돼지새끼 한 마리를 보고선, 필시 하늘이 내린 영물(靈物)이라 여겨 흥분에 들떴다. 임금에게 진상하기 위해 그 하얀 새끼 돼지를 귀하게 싸매 안고 요하(遼河)를 건너 요서(遼西)로 향했다. 천리 여정 끝에 요서에 다다르고 보니, 헉, 그 곳의 돼지는 모두 흰 돼지라. 요동의 돼지 치는 이는 그 길로 흰 돼지를 버리고 다시 제 고향으로 되돌아 갔다. 하여 말하길 요동백시(遼東白豕), 요동의 흰 돼지.

 

한 두어 달 쓰려고 했던 게 반년을 넘겼다. 그만큼 주절주절 말이 많아진 게다. 말은 말을 부른다더니, 아닌 게 아니라 한 두 마디 해놓고서도 오히려 서너 마디쯤 모자란 듯 느껴지는 게 말이다. 참 말도 많고, 그 때문에 탈도 많은 세상에 대고 잡설을 하나 더 얹는 게 아닌가 싶어 늘 걱정했지만, 그래도 소통(疏通)의 감을 느낄 때면 유난히 잘 풀리지 않는 날조차 행복했다.

지면(紙面)이 범람하는 시대라지만 어느 것 하나라도 귀하지 않은 건 없다. 짧지 않은 동안 소중한 자리를 내준 밴쿠버 조선일보에 감사한다. 그리고 잔망스런 글들을 알뜰살뜰 읽어주고 격려해준 여러 독자께 가슴으로부터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추조람경(秋朝覽鏡)’은 이쯤으로 마무리하지만, 이른 가을아침 맑은 거울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잘 살펴보는 것처럼, 스스로의 허물을 살피는 일에는 소홀하지 않으리라 새삼 마음을 다져본다. 다시 독자들과 만나게 되는 벅찬 인연을 앙망하며.

*필자 김기승은 1979년부터 극단76극장, 극단 실험극장, 환 퍼포먼스 그리고 캐나다로 이민오기 직전 PMC 프로덕션 등을 중심으로 공연계에서 활동했고 연극, 뮤지컬, 영화, 콘서트, 라디오 등 100여 편의 작품들에서 연기, 연출, 극작, 기획 등을 맡아왔습니다. 제목 '추조람경'(秋朝覽鏡)은 당(唐)나라 설직(薛稷)이 쓴 시의 제목으로, 제자(題字)는 필자가 직접 썼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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