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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지대(眼施地帶)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7-01-08 00:00

몇 번을 생각해도 걷는 일처럼 몸과 마음이 동시에 깨어나는 것은 없는 듯하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요즘 세상에서 산책이라는 단어는 호사스럽다. 산책까지야 바랄 것도 없지만 그냥 거리를 걷는 것만 해도 참 좋다. 아무 길이나 그저 걷다 보면 작은 땀방울 하나가 가느다랗게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몸이 깨어나는 듯 참 좋다.

걷다 보면 저절로 생각에 잠긴다. 걷다가 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통해서 먼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또는 어떤 영감(靈感)에 사로잡힌다. 아니면 거리의 풍경과는 무관한 혼자만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펼쳐지기도 한다. 마음이 깨어나는 듯 참 좋다.

때론 사색하기 위해 일부러 걷는다. 어딘가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에 잠기는 것도 꽤 매력 있는 일이지만, 걸음의 속도에 따라 생각의 전개가 리듬을 타는 것에 비하면 좀 덜하다. 찬찬히 걸으면 생각도 찬찬히, 급하게 걷거나 마구 뛰면 생각도 그에 따라 속도감을 지니게 마련이다.

또 누군가와 마주 앉아 차 한잔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풍경도 참 좋지만, 함께 걸으며 나누는 대화의 묘미도 훌륭하다. 함께 걸으며 나누는 대화는 쉬 흥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착 가라앉지도 않는다. 그저 두 사람이 걷는 속도만큼의 농도를 유지한다. 적당한 리듬이 저절로 형성된다.

요즘처럼 녹녹하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리를 걸으며 생각하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기대 이상의 풍요로움을 안긴다. 걷는 동안이나마 거리는 나만의 섬이 되고, 걷는 만큼 마음의 평화를 이룬다.

그러나 거리를 걸으며 갖는 이러한 풍요로움이 한 순간에 깨지는 곳이 있으니, 횡단보도다. 아니 그냥 깨지는 정도가 아니고 순간적으로 솜털까지 곤두서는 긴장감에 휘둘린다. 큰 길은 좀 나은 편이지만 웬만한 이면도로쯤의 횡단보도에서는 신호등의 유무에 상관없이, 거의 공포에 가까운 아찔한 긴장이 발생한다.

한껏 달려오던 차들은 횡단보도에 거의 다다르도록 그 속도를 줄일 줄 모른다. 교통신호등은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고, 아스팔트 위에 하얗게 칠해놓은 횡단보도 표시조차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하는 평화의 표식이 되지 못한다. 순진하게 신호등이나 횡단보도를 믿었다간 큰 탈이 나기 딱 알맞다.

저들도 차에서 내리면 걸을 텐데… 눈초리라도 마주치면 좀 나을까 하여 연신 애를 써도 그들의 시선은 싸늘하게 제 갈 길만 응시한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는 경우에도 그들의 눈빛은 차라리 외면하는 것만도 못하게 서늘하여 무안함을 안긴다.

불가(佛家)에서 중요시하는 것으로 보시(布施)가 있다. 보시는 베푸는 것을 말함인데, 재물을 베푸는 재시(財施), 가르침을 주는 법시(法施), 그리고 살생을 삼가는 무외시(無畏施) 등 크게 세가지로 나누지만, 한국불교에서는 이를 더욱 세분화하여 베푸는 일이 일상 전반에 스며들기를 강조하고 있다.

남을 위하는데 몸을 부지런히 하고(身施),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心施),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顔施), 나를 찾아주는 이를 위해 방을 청결하게 하고(房施), 어른들의 자리를 잘 정돈하며(座施), 말하기를 부드럽게 하라(言施)는 여섯 가지 외에 한가지가 더 있어 이른바 한국불교에서의 칠시(七施)라 하는데, 그 나머지 하나가 바로 부드럽고 따듯한 눈빛으로 남을 대하라는, 안시(眼施)다.

이러한 칠시 가운데 그야말로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도 가장 수월하게, 또한 부담스럽지 않게 나눌 수 있는 것이 따듯한 눈빛일 거다. 서로를 사납게 쏘아보는, 차갑게 외면하는 눈빛을 모두 거둬내고, 안시지대가 된 횡단보도를 상상해 본다. 떠올리기만 해도 훈훈하다.

정해년(丁亥年), 새해다. 더도 바랄 것 없이, 선량한 사색(思索)이 가득하여 평화로운 거리, 모르는 사람끼리도 선하고 따스한 눈빛을 나누는 도시, 새해엔 그런 곳을 걸으며 지내면 참 좋겠다.

*필자 김기승은 1979년부터 극단76극장, 극단 실험극장, 환 퍼포먼스 그리고 캐나다로 이민오기 직전 PMC 프로덕션 등을 중심으로 공연계에서 활동했고 연극, 뮤지컬, 영화, 콘서트, 라디오 등 100여 편의 작품들에서 연기, 연출, 극작, 기획 등을 맡아왔습니다. 제목 '추조람경'(秋朝覽鏡)은 당(唐)나라 설직(薛稷)이 쓴 시의 제목으로, 제자(題字)는 필자가 직접 썼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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