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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를 생각하다 2024.04.08 (월)
 가져가야 할 짐들을 거실 가득히 늘어놓은 채, 남편은 가방에짐을 챙겨 넣고 있다. 그가 짐 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다시 떠난다는 게 실감 난다. 가방의 지퍼가 고장 났는지 닫히지 않는다고 남편이 말한다. 그를 붙잡고 싶은 내 마음이 염력을부린 듯하다.남편은 파도 치는 바다로 고생하러 가면서도 아내의 눈치를 본다. 뭘 사다 주면 좋겠느냐고 자꾸 묻는다.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드는데 눈물이 또 주책을 부린다. 냉장고 문을 열고...
정성화
골덴 바지 2024.01.29 (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나는 겨울이면 늘 어깨를 웅크리고 다녔다. 어머니는 내가 키가 크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며 자주 나무라셨다. 그게 마음에 걸렸던 지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골덴 바지를 한 벌 사오셨다.  바지에 대한 촉감은 허벅지까지 먼저 알아차린다. 병아리 털에 닿은 듯 부드럽고 포근하면서 약간 간지럽기도 했다. 그런데 길이가 길고 품이 컸다. 내 허리춤을 잡아보며 어머니도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성화
지금이 좋을 때 2023.11.06 (월)
  왼쪽 눈에 황반변성이 생겨 주기적으로 동네 안과에 다니고 있다. 어느 날 진료를 마친 원장님이 말했다. 의학 전문지에 올라온 통계를 보니 노년의 건강이 잘 유지되는 시기는 대개 75세까지 라며, 눈에 이상이 있다 해도 지금이 좋을 때라고 했다.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그는 “내 발로 걸어서 내가 가고 싶은 데를 갈 수 있으면 좋을 때지요.”라고 했다.  내 발로 걸어서 어디를 간다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인지 체력이 좋은...
정성화
우엉을 먹으며 2023.10.04 (수)
  남편이 선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다. 배에서 가족 생각이 날 때 나를 어떤 모습으로 떠올리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노릇노릇하게 익은 삼겹살을 가위로 숭덩숭덩 자르던 모습’이라고 했다. 실망스러우면서 민망했다. 그만큼 내가 삼겹살을 자주 구워 먹었다는 얘기다.입맛도 연어처럼 제가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걸까. 근래 들어 어릴 때 먹었던 음식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저녁별이 하나 둘 돋아나는 초저녁에 평상에...
정성화
농부 이반의 염소 2023.04.11 (화)
  러시아 민담에 ‘농부 이반의 염소’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반은 이웃인 모리스가 염소를 키우면서 점점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게 부러웠다. 부러움은 차츰 질투로 변해갔다. 어느 날, 하느님이 이반의 꿈에 나타나 “이반아, 너도 염소를 갖고 싶으냐?”고 물었다. 이반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모리스의 염소를 죽여주십시오.”라고 했다. 하느님은 말없이 사라졌다.이 이야기를 읽으며 섬뜩했다. 열심히 풀을 뜯어먹고 매일 많은 젖을 내는...
정성화
다시 수필이다 2023.01.09 (월)
  유리병에 개운죽竹을 기르고 있다. 물만 먹고도 싱싱한 잎과 줄기를 내는 모습이 여간 기특하지 않다. 줄기 하나를 집어 들면 나머지 줄기들도 따라 나선다. 서로의 뿌리 속에 뿌리를 내린 채 단단히 엉겨 있기 때문이다.가장 밑바닥에 자리 잡은 묵은 뿌리 위에서 하얀 어린 뿌리들이 걸음마를 익히고 있고, 중간에 가부좌를 튼 뿌리들은 어느 쪽으로 줄기를 낼 것인지 긴 생각에 잠겨있다. 어린 뿌리에 자꾸 마음이 간다. 수필을 쓰면서 어느...
정성화
도마소리 2022.11.28 (월)
  함성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사이로 '다각다각' 하는 소리가 끼어들고 있었다. 도마 소리였다. 잠결에 듣는 소리는 가까이 들리는 듯하다가 다시 멀어진다. 그래서 아련하다. 윗동네의 예배당 종소리나 이른 아침 '딸랑딸랑' 들려오던 두부장수의 종소리, 도마 소리가 그러했다.어머니는 소리로 먼저 다가오는 분이었다. 펌프질을 하는 소리, 쌀 씻는 소리, 그릇을 챙기는 소리 등. 그 중 도마소리는 잠을 더 자라고 토닥여주는 소리였다. 나는 그...
정성화
남자들은 뇌 구조상, 스포츠 선수 이름을 기억하거나 기계 사용설명서를 판독하는 일에는 빠르지만 감정이나 상황을 짚어 내는 감각은 여자들보다 느리다고 한다. 우리 집 경우만 봐도 그렇다. 아침나절에 남편이 나를 무시하는 투로 말을 해서 기분이 상했다. 내가 온종일 굳은 표정을 짓고 있어도 그게 자기 탓인지 몰랐다. 류현진이 등판하는 야구를 즐겁게 보고, 점심도 맛있게 먹고, 낮잠도 쿨쿨 잤다. 그러다가 다 늦은 저녁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