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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알못의 윤찬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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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3-02-27 08:48

김보배아이 / (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나는 클래식 문외한이다. 평생 즐겨 들은 클래식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곡과 비발디의 사계 정도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따로 들려주고 어느 계절이냐고 묻는다면 ? ….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과 합창 교향곡은 구분하지만, 베토벤의 곡과 모차르트의 곡은 가르지 못하는 귀를 가졌다. 이렇게 듣는 귀가 없는 사람을 “막귀”라고 한다. “클알못”은 ‘클래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다. 클래식 듣기에 입문한 사람은? “클린이”라고 한다. ‘클래식 어린이’의 준말이다. 

약 8개월 전, 나는 유튜브 인기 영상을 하나 클릭하게 되었다. 그리고 차마 말로 다 설명이 안 되는 ‘덕후’(광팬을 지칭하는 일어에서 파생한 신조어)의 세계에 입성하게 되었다. 1958년 구소련이 존재하던 냉전 시대, 미국인 ‘반 클라이번’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참가하여 우승까지 거머쥐며 세계적 이슈가 된다. 미국의 영웅이 된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을 기려 ‘반 클라이번 콩쿠르’가 시작되었다. 2022년 6월 한국의 ‘임윤찬’은 대회 최연소 참가자이면서, 온라인으로 3만 명이 투표해 뽑은 청중상과 최우수 현대음악 연주상 등 3관왕으로 우승하여 파란을 일으켰다. 콩쿠르 60년 역사상 최연소 우승자이기도 하다. 그의 결승전 연주 영상은 콩쿠르 개최 8개월 만에 대략 천만 뷰에 이른다. 피아노 연주 영상이 이처럼 화제의 중심에 선 사례는 이례적이다. 게다가 그는 기자회견 때마다 어록을 만들어냈다. 18살 나이를 믿기 힘들게 도사 같은 말을 하여 108살이 아니냐 할 정도다. 그러니까 나는 하루가 다르게 젊은 거장에게 점점 더 반하고, 더욱더 빠져들었다. 지금 나와 같은 병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전 세계적으로 꽤 많다. 그리고 이를 가리키는 이름도 있다. “윤찬 앓이”라고 한다. 영어권에서는 “Yunchanmania”라고 한다. 

클알못의 정체성을 지녔던 나는 임윤찬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를 보다가 울었다.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데, 이상하게 뇌는 맑아지고, 심장은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드라마도 아닌 클래식 연주에 운 것도 신기했지만, 나는 그의 연주가 보고 싶어 또또또 다시 보았다. 까만 밤이 하얀 새벽이 되도록 미치도록 반복했다. 분명 40여 분이 넘는 공연 시간이었는데 몇 분에 불과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날 이후 나의 일상은 이상한 나라 토끼 굴로 빠진 듯했다. 임윤찬의 모든 연주곡을 복습했다. 특히 준결승 연주곡이었던 ‘초절기교 연습곡’을 볼 때는 '말잇못(말을 잇지 못할 정도)'이 되었다. (내가 자주 인터넷 용어를 여기에 소개하는 까닭은 이 또한 내가 빠졌던 토끼 굴 속에서 터득한 이 시대의 언어들이라서다) 임윤찬은 객석에 인사하고 피아노 의자에 앉자마자 냅다 건반을 속주 했다. 시작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60분간 인터미션 없이, 말 그대로 기절초풍할 수준의 피아노 연주 기교를 총망라한, 리스트가 온 생애에 걸쳐서 완성했다는 12개의 피아노곡은 너무 아름다워서 '숨멎(숨을 못 쉴 만큼)'의 연속이었다. 그런가 하면 곡을 마치고 다음 곡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1분 30초가량(생각보다 90초는 상당히 길다) 멈춘 적도 있었다. 그 이유를 나중에 밝혔는데 "바흐 곡을 연주할 때 영혼을 바치는 기분으로 연주했기 때문에 다음 곡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힘들어서 시간을 둔 것"이라고 했다. 임윤찬은 말을 느리고 어눌하게 하는 반면, 매우 신중하고, 겸손한 어휘를 내놓았다. 외국으로 유학을 갈 거냐고 질문하자 한국에 '위대한' 스승님이 계시니 스승님과 의논해 보겠다고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스승 한국예술종합학교 손민수 교수는 그에게 "시간 여행자"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주옥같이 쏟아 낸 많은 인터뷰 대답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우륵’을 언급했을 때다. 음악적 영감의 발원지를 묻는 MBC 기자에게 우륵의 ‘애절하지만 슬프지 않은(哀而不悲)’ 가야금 뜯는 소리를 상상하면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다고 답했던 것이다. 18세 소년 피아니스트에게 영감을 준 인물로 '신라 시대의 우륵'이 웬 말인가!  "어떤 울분을 토한 다음에 갑자기 나타나는 우륵 선생의 어떤 가야금 뜯는 소리를..", "..마음에서 나쁜 것을 품으면 음악이 정말 나쁘게 되고, 마음으로부터 정말 진심으로 연주를 하면 음악도 정말 진심이 느껴지게 되는 게 음악의 정말 무서운 점", “..결국은 이 음악을 하는 이유는 어떤 슬픔과 기쁨과 그 다음에 소통을 하기 위해서고.." 구구절절 옹골찬 철학에 내 가슴은 요동쳤다. 

임윤찬의 연주는 “듣는 음악에서 나아가 보는 음악”으로 회자한다. 피아노 앞에 고요히 앉은 채, 보는 이의 몰입을 방해하는 연주자의 과한 표정이 없어 담백하다. 그런데 악상의 프레이징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구간에서 제스처는 발전한다. 작위적이지 않아 자연스럽다. 적시 적소에 몸을 사용해 소리의 강약을 고조시키니, 보는 이가 빨려 들어간다. 웅장하고 빠른 템포에서 박력이 넘치고, 발랄한 장조 구간에서는 토끼 같은 표정도 보여준다. 오른손으로 연주하고 왼손으로는 지휘할 때도 있다. 공중 부양하는 풍성한 더벅머리를 빼놓으면 섭섭할 텐데, 기자들이 포즈를 요청할 때 어쩔 줄 몰라 수줍음 타는 사람과 한 인물인지 의아할 만큼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머리카락으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날 것의 야생마 같은 음들이 유리처럼 또랑또랑 명징하게 내 귀에 박힌다. 비록 내가 '막귀'로서 소리를 구분하는 분별력은 없다 쳐도, 그가 연주하다가 오케스트라를 향해 돌아앉고, 플루트 솔리스트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 지휘자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교감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내가 주인공이야.' 식의 묵언의 으스댐은 찾을 수 없다. 곡 전체의 서사가 절정에 다다를 때 땀방울을 뚝 뚝뚝 떨군다. 흡사 비처럼 떨어지는 그것은 음악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제의 아우라에 가까워 신성한 느낌마저 준다. 손바닥만 한 잿빛 연습실에서 수많은 시간을, 수없이 반복해서 연습하지 않고서야 그러한 완성에 이르지 못 하리라. 어린 예술가의 숭고한 노력이 주마등처럼 켜지면서 인생을 돌아보게 했다. '나도 너처럼 뜨겁게, 다시 미치도록 노력해보고 싶다'라고. 그는 내 인생 3막에 불씨가 되었다. 

임윤찬 연주의 아름다움의 정체는 뭘까? (클래식 문외한이 분석하고 있어 근거는 전혀 없다) 왜 그렇게 윤찬에게 열광할까? 왜 하필 클래식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유난히 가 닿을까? 수백 년 전의 창작물이 어리디어린 예술가에 의해 완전히 참신한 해석을 거쳐 발현되는 데서 오는 경이로움이다. 그 나이가 어리니 연주도 미숙할 것이라는 당연한 예상을 깨는 성숙하고 노련한 소리 때문이다. 흔하게 들었던 '엘리제를 위하여'나 '녹턴'도 새로운 노래처럼 들리게 하는 마법 때문이다. 출근길 버스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고등학생 같은 얼굴이 피아노 앞에서는 신처럼 예술을 펼치는 특급 반전이라서다. 한 관객이 "클래식 귀족만 향유하던 세계의 문을 클래식 서민들에게 열어주었다"고 평했다. 적어도 나에게 임윤찬의 음악은 이제껏 이해하지 못했던 우주로 나를 데려가 주었다. 임윤찬은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는다. 피아노로 노래한다. 아니, 임윤찬은 피아노로 노래하지 않는다. 임윤찬이 피아노다. 

장작처럼 메말랐던 가난한 영혼에 그의 예술이 술처럼 부어져 나는 취한다. 윤찬의 술기운으로 내 인생 제 3막에서 춤 한판 신명나게 춰볼까 한다.(writingmyparentslif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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