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마지막 한 장 넘기며

김춘희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3-01-05 09:08

김춘희 / (사)한국문협 밴쿠버 지부 회원
  마지막 한 장 달랑 남은 2022년 달력은  더 이상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2023년 새 달력에 자리를 내 주어야만 한다. 월말이면 어김없이 한 장씩 넘기다가 오늘은 12번째 막장을 내린다. 새 달력을 걸어 놓고 이제 막 내려놓은 낡은 한해를 한 장씩 훑어 본다. 크고 작은 일들이 어제 일처럼 펼쳐진다.  내 산책 견이 강원도 강릉에서 비행기를 타고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여 마중 나갔던  일, 형제들의 방문, 아이들과 여기저기 여행했던 아름다운 경치들, 좋지 않은 일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되도록 빨리 망각의 호수로 던져 버린다.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이 더 많았다.

  나는 많이 살았다. 어려서는 어떻게 하면  빨리 어른이 되어 독립할 수 있을까 꿈꾸었다. 사회로 진출하기 위한 작업으로 공부도 열심히 해 보았고 결혼과 아기 출산의 기쁨도 맛보았다. 캐나다로 이민을 나와 살면서 기쁘고 힘들었던 일들을 뚫고 나는 무사히 지금까지 살아 왔다. 은퇴를 하기 전엔 어떻게 살아야 보람된 노후를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으로 한때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 많은 시간이 한꺼번에 압축되어 달력 마지막 장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백세 시대라더니  남의 말이 아님을 몸으로 느껴본다.  14년만 더 살면 100이란 숫자가 바로 나의 나이테가 된다. 그러니 장수를 누리며 살고 있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보다는 무엇을 하며 내 인생의 마지막 장을 멋지게 잘 장식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떠날 준비는 늘 나와 함께 해야 할 매 순간의 과제다.

더는 미루지 말고 마무리해야 할 것과 더는 망설이지 말고 시행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러면  혹자는 그 나이에 뭘 더 하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영어로는 버킷리스트라 한다. 즉 희망 사항 목록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목록을 써 보는 것이다.

  나는 지난 한 해에 꼭 하고 싶었던 것을 다 하지 못 했다. 여러 가지 있었지만  게을러 실천 못한 것은 내 탓이다. 그게 무슨 대단한 일들은 아니다. 아들이 식구들을 태우고 노는 카누를 타 보는 그런 유치한 것들이다. 아이들이 캠핑을 가거나 배를 타거나 하는 레이저에 되도록 동참한다. 지난여름에는 아들과 함께 카누를 타고 노를 저어 봤다. 물 위에 미끄러지듯 배가 앞으로 나갈 때 그 느낌이 바로 젊음이었다. 유치하지만 어쩌겠는가!  최대한으로 젊음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나는 먹고 싶은 것도 다 먹어본다. 만약 내가 내일 이 세상을 하직한다면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지상 음식을 되도록 다 먹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먹고 싶을 때는 아이들과 함께 찾아 나선다. 그렇다고 식도락은 아니다. 그저 가끔 생각나는 음식이 있을 때 과거를 회상하고 싶을 때 나는 그 음식을 찾아 먹는다. 지난여름 동생들이 왔을 때는 어렸을 때 내가 싫어했던 멍게를 먹었다. 어려서는 인단 냄새가 나서 입에도 안 대었는데, 멍게 맛이 그리도 좋은 줄 미처 몰랐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뭐든지 시도 해 본다. 내가 전에 싫어 했던 것들이 지금은 좋아하게 되는 나를 보면서 나는 정말 많이 변했다고 생각 한다.  다리 힘이 아직 좋을 때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보고, 먹거리 경험도 더 하고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하시지 않았는가!  하느님이 좋다 하신 것들을 내가 싫어 할 이유가 없다.  산다는 것은 체험하는 것이다. 아무런 체험도 없이 덤덤히 살면 그런 인생은 맛이 없다.

  나는 결혼을 33세를 넘겨 1972년에 했다. 그때는 만혼이라 모두 놀랐다. 지금은 결혼 적령기가 없어졌지만, 우리 때는 대학 나오고 시집가고 남자는 군대 다녀오고 장가가고 할 때였으니 나는 결혼 지각생이다. 인생을 서둘러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결혼했다. 대학 나오고 고교 교사하다가 파리로 유학 가서 공부하고 다시 대학 모교로 돌아가 나의 전공과에서 가르쳤다. 그리고 결혼했다. 일생을 걸고 하는 결혼이야말로 내가 꼭 체험하고 싶었던 나의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였다. 아이도 낳아 기르고 착한 아내 노릇도 해 보고 지금은 시어머니가 되어 할머니 소리도 듣고 사는 평범한 시니어가 되었다.

 나는 또 함께 사는 것을 더 선호하는 좀 바보스러운 사람이다. 독립적인 생활은 젊어서 해 보았고, 이제 내 나이에는 독립적인 것보다는 함께 사는 것이 좋다. 아들과 함께 살고 있으니 편하다. 내가 잡다한 살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휴지가 떨어져도 애들이 사다 채워준다. 전기료,  방세 걱정 그런 건 아들 집에 들어오면서 내 몫이 아니다. 딸도 가까이 살아서 이것저것 챙겨 준다. 함께 살아서 손해 볼일이 아무것도 없다. 가끔 아이들에게 한국 음식을 해 주고 손녀들에게 열심히 한국어로 말해 주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다. 아니, 일이 아니라 즐거운 나의 일상이다. 손이 움직이고 몸이 성하면 아무 때라도 아이들에게 한국의 맛을 입에 담아 준다.

 달력 막장을 내리면서 새해엔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살아 볼까? 가슴 설레는 기다림을 해 본다.

날이 풀리면 옆집 청년에게 모터사이클 뒤에 나를 태우고 동네 한 바퀴 돌아 달라고 부탁할까 한다. 쌩쌩 달리는 모토 사이클을 한번 타보면 그 기분이 어떨까 맛보고 싶다.

 이것을 읽는 독자들 가정에 하늘에서 넘치도록  축복이 내리기를 빌면서  2023년 새 달력을 희망과 함께 걸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따로 또 같이 2023.02.13 (월)
 오늘은 집에 손님이 오는 날이다. 저녁 준비로 동동대는 내 옆에서 남편은 어느 때보다 협조적인 자세로 하명을 기다리고 있다. 청소기를 돌리고 거실 유리창을 닦고 바베큐 그릴도 달구고… . 바쁜 가운데 손발이 맞는 손님맞이는 수월하게 마무리가 되어 간다. 오늘 손님은 같은 해 밴쿠버에 정착해 한동네에 살던 유고인 프레드락과 수잔나 부부이다. 연배가 비슷한 우리는 긴 세월 서로의 집을 오가며 일상의 애환을 나누고 살아온 귀한...
조정
겨울 앓이 2023.02.13 (월)
겨울은 망각의 푸른 바다를 건너 약속의 봄을 찾아가는 빈 가슴 나그네 긴 회한의 터널 그 너머찬 바람, 서리 다 이겨낸지친 들판에 서서 만나야 할 그 사람                                      찾아야 할 그 사랑잃을 수 없는 시간 속으로배냇그리움에 멀미가 난다 다가올  새봄은 또다시 찾아오는 아픔이겠지나를  죄어오는 망연(忘戀)의 넋일 수 있어 가는...
김석봉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둘째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쓴 글을 발견하였다. 이런 흔적 물들을 통해 과거를 되새김질해 본다. 실체가 없어도 있었던 현실인데도, 실체가 있어야 지난 현실이 또렷해진다.통통한 몸매와 얼굴에 늘 웃음이 가득하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둘째는 입력한 것에 비해 출력을 재미있게 잘한다. 좀 엉뚱한 구석이 있는 놈이다. 그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저의 형 박형진입니다.나이는 이제 9살이 되고요,...
박광일
나무 의자 2023.02.13 (월)
망자를 기억하며숲 길 모퉁이 고즈넉한 곳지나는 사람 발걸음 위로하며  떠난 사람 이름 써넣은나무 의자 놓여있다꽂아 놓은 조화는 을씨년스럽고애처로워다니는 사람 마음 훔쳐간다사랑하는 이 떠나보내지 못한 채품에 보듬어 안고 이랑을 지었나 보다 마주하던 죽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안간힘으로 도망쳤을까?죽음을 순하게 받아들이는기백 보였을까?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은 채침묵으로 견디며한 길로 나 있는 신작로...
박혜경
내 인생의 강물 2023.02.06 (월)
    인생의 강물은 내 맘대로 흐르지 않는다. 누구나 그렇다. 완만하게 굽이돌며 한 없이 흐른다. 거침없이 흐르는 푸른 강물이다. 내가 나에게 끼어들 새가 없다. 일반적으로 강물에 실린 그리움과 기다림의 원천은 어머니다. 그런데 나의 그것들은 내 나이 열한 살 때, 보라색 치마에 긴팔의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온 띠동갑의 한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시집갈 나이 스물셋에 산골 초등학교에 주산 선생님으로 왔다. 살랑살랑...
박병호
만두 필살기 2023.02.06 (월)
  설 하면 역시 만두를 빼놓을 수가 없다. 만두 국 뿐만 아니라, 구워도 먹고, 찜 기에 쪄서 먹어도 결코 질리지 않는 음식 중 하나다. 무엇보다도 엄마가 만들어 준 손 만두는 설날에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었고, 밀가루로 반죽한 만두 피까지 쓱쓱 밀어가며 속을 듬뿍 넣고, 아기 궁둥이 마냥 토실 하고 먹음직스럽게 왕 사이즈로 빚어 먹었다.그 시절, 어렸던 난 엄마를 따라 손 만두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가 만두 중에서도 속이 제일 작아...
허지수
화산석 2023.02.06 (월)
솟구친붉은 핏줄​바늘 끌연흔일까​그림자새기면서​굳어버린주름살​거미 귀엿듣는 듯​초 침 소리기울이면​기나긴씨 날 줄 찾아​은빛 침핥고 간다
하태린
너 떠난 그날 2023.02.02 (목)
너 떠난 그날비바람이 울었다너로 인해 살아온 날들이고마웠다고찔레꽃 하얀 무덤가홀로가는 네가 그랬듯이홀로찾은 나도 그렇게 슬펐다목련이 지듯 떠나가는 것들찔레꽃 하얀 무덤가허공에 그리움에 문패하나 걸고아쉬워 뒤돌아가던 걸음 문뜩 멈추고뒤돌아서 너를 보며그 설음에 겨워나 홀로 오래도록 서 있었다고너 떠난 그날 바람처럼 울었다.
이봉란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