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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바램”

김유훈 yhuh@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1-08-03 08:30

김유훈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해외에서 바라본 대한민국은 대단한 국가이다.  불과 60 여년만에  전세계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우리의 어린시절 6.25 전쟁 이후 대부분이 가난했고 서울의 청계천과 산동네에는 판자촌이 대부분이였다.  지금 청계천 주변에는 고층빌딩들로, 판자촌은 고층아파트  마을들로 변한 모습은 고국을 방문할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역사가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변하게된 원인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과의 한미 방위 조약을 맺어 국방을 튼튼히 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룩한데 있으며 그 당시 국내의 산업  현장은 물론 독일, 월남 그리고 중동 등 해외로 떠났던  수 많은 산업의 역군들이 피와 땀으로  일하였으며 이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역사의 산 증인들이다.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과 함께 기적적인 성장을 이룬 분야  중 하나로 한국의 기독교가 있다.   이조말 1880년대 중국으로  파송된 미국의 선교사가 의주의 청년들에게 전도하여 의주에 교회가 세워졌다.  평북 의주는 나와 아버님의 원적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의주 동교회 권사로, 큰 아버님은 장로로 봉사하셨다.

비록 6.25 전쟁 중에 그분들은 월남을 못하였지만 많은 의주의 피란민들이 창신동에 동신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과 청년의 때에는 동신교회는 내 삶의 일부였다.  그곳에는 사랑과 우정, 신앙을  키워갈 수 있었던 곳이다.  나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중등부 교사로 봉사하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였고 첫 아들을  낳았다.  그 후 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신림동에 있는 세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서천과 마석에서  사역하다가 캐나다로 유학을 위해 오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의 신앙의 뿌리는 평북 의주에서 시작되어 내가 목사가 되었으며  지금은 아들의 세대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 아들은 초등학교때 이곳에 와서 중고등학교는 패시픽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을 다니다  한국의 한동대 법대를  나와 법률대학원에 입학하였다.   그 당시 나와 아내는 미국의 뉴욕의 변호사가 곧 되는 줄 알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대학원 1년 반을 마치고 나서 “죄를 지은 사람과 잘 못한 사람들을 위해 죄가 없다고 변호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할 일이 아니다”라며 학교를 휴학하였다.  그 후  아들은 한국의 평택에 있는 교회 반주자 아가씨와 체팅으로 만나 한국에서 결혼하고 그 곳에서 순복음  신학을 마치고 전도사로 일하였다.  그리고 금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카나다에서 20년을 살다가 한국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무엇 보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제일 클 것이다.    


나의 작은 소망이 있다면  우리 아들이  완벽한 이중언어는 물론 한국과 카나다에서 배우고 생활한 경험으로  차세대의 준비된 목회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칠순이 넘은 내가 지금도 트럭의 핸들을 놓을 없는 이유는 금년에 교회를 개척한 아들의 가정을 도와주기 위함이다.  나는 오늘도 귀엽고  사랑스런 손주들을 생각하며 미국 국경을 향해 트럭을 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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