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9일(현지 시각)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을 경질했다. 정권 교체기에 전 세계 미군 배치와 운영을 결정하는 안보 책임자를 교체한 것이다. 미국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안보 지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새 정권의 권력 인수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임기를 70여일 남겨둔 트럼프가 대선 불복을 계속하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각 숙청과 측근 사면, 심지어 군사 공격까지 할 수 있다는 ‘트럼프 리스크’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는 이날 트위터에 “아주 존경받는 크리스토퍼 C. 밀러 대테러센터국장이 국방장관 대행이 될 거라는 걸 발표하게 돼 기쁘다”며 “즉각 효력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크 에스퍼는 해임됐다. 그의 공직에 감사하고 싶다”고 했다.

에스퍼 장관은 트럼프가 ‘예스퍼(Yes-per)’라고 부를 정도로 ‘예스맨’으로 꼽혔다. 그러나 지난 6월 초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군 동원을 반대하면서 트럼프의 분노를 샀다. 에스퍼는 이날 군사 전문 매체 ‘밀리터리 타임스’에 공개된 인터뷰에서 트럼프와 “큰 싸움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인터뷰는 대선 직후인 지난 4일 이뤄진 것으로, 에스퍼는 이때 이미 자신의 경질을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내 후임으로 진정한 ‘예스맨’이 올 것”이라며 “그때는 하느님이 우리를 돕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무언가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가 남은 임기 중 이란 등을 겨냥해 군사작전을 감행할 수 있다는 우려도 국방부 내에 존재한다고 전했다.

트럼프는 대선 후 ‘비충성파’ 고위 공직자들을 잇따라 숙청하고 있다. 지난 6일엔 미국의 해외 원조 담당 부서인 국제개발처(USAID) 보니 글릭 부처장을 해임했고, 리사 고든 해거티 국가핵안보국 국장도 같은 날 갑작스럽게 물러났다. 지난 5일엔 채터지 연방 에너지규제위원회 위원장을 강등시키기도 했다. 미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권력 누수를 막기 위해 충성도가 낮은 관리를 제거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CNN 등 미 언론은 다음 숙청 대상으로 트럼프가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명해온 크리스토퍼 레이 연방수사국(FBI) 국장과 지나 해스펠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이 타깃이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레이 FBI 국장은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 차남 헌터의 해외 사업 관련 의혹에 대해 공식 수사에 착수하지 않아 눈밖에 난 것으로 알려졌다. 해스펠 CIA 국장은 2016년 대선 당시 FBI가 트럼프 선거캠프 관계자를 감청하는 등 수사를 한 것과 관련한 문서의 기밀 해제를 해주지 않아 트럼프의 반발을 샀다. 또 코로나 대응과 관련해 트럼프와 사사건건 충돌한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 소장에 대한 해임을 추진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인터넷 매체 복스는 이날 트럼프가 정권 교체기에 자신 때문에 수사를 받아 감옥에 가 있거나 기소된 측근들에 대한 사면을 할 수 있다고 봤다. 심지어 자신과 자신의 회사가 받는 자금 세탁 등 각종 혐의에 대한 ‘셀프 사면’을 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트럼프 대선 캠프의 ‘러시아 내통 의혹’을 수사했던 ‘로버트 뮬러 특검팀’ 특검보를 했던 앤드루 와이즈먼은 최근 공영라디오 NPR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낙선한 뒤 자신은 물론, 가족,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트럼프 오거나이제이션)까지 사면할 수 있다”고 밝혔다. 뉴욕 검찰은 1년 넘게 트럼프 회사의 자금 문제를 수사하고 있다. 트럼프가 부정투표 가능성을 언급하며 줄소송에 나서는 것도, 새로 출범한 정권과 ‘정치적 거래’를 통해 자신의 퇴임 후 안전 보장을 받기 위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가 퇴임 전 백악관의 민감한 서류들을 소각해 버리거나, 연방판사를 대거 임명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연방판사는 현재 수십 명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시사지 더 네이션은 트럼프의 남은 70여일에 대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무자비한 레임덕(Ruthless Lame Duck) 기간이 될 것”이라며 “(트럼프 행정부의) 그 어느 때보다 잔인한 기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워싱턴 조의준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