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희 / (사)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산 정상에 서서 내려다본다. 몇 개의 구릉 넘어 지붕인 듯한 검은 점들이 조화롭게 박혀 있다.
투명한 공기 속으로 모습을 드러낸 마을은 한걸음에 다다를 듯, 가까이 보인다. 지친 몸에서 다시
용기가 꿈틀거린다. 내려가기 위해 신발 끈을 바짝 조이고 지팡이의 키를 높인다.
굽이굽이 휘어져 오르내리는 산등성이를 따라가면서, 사막의 신기루같이 보이는가 하면 다시
사라져 버리는 마을의 거리를 가늠해 본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국경이 맞닿는 이베리아반도
서북쪽.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 아래 펼쳐진 포도밭, 그리고 올리브 나무숲. 유채 꽃밭과
돌산으로 이루어진 오지에 가시거리는 멀기만 하다.
발바닥은 화끈거리고 부르튼 발가락은 몸부림을 치고 있다. 몇 번이나 주저앉아 가까이 보이는
마을을 원망한다. 목표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생각 없이 걸었는데 목표가 보이자 마음이
급해지고, 급한 마음과는 달리 지친 몸은 결코 속도를 내질 못한다. 어설픈 기대는 일시적으로
용기와 희망을 줄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하여 도리어 지치게 할 수도 있는 것임을.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선택이란 다른 길이 있거나 방법이 있을 때 하는 것이 아닌가.
육신의 반란을 무시하고, 돌길 가장자리에 군락 지어 있는 클로버 무더기를 지팡이로 뒤적거리며
네 잎 클로버를 찾아본다. 나는 무의식 속에 땀 흘리지 않고 얻어지는 어떤 행운을 기대한 것은
아닐까. 이 길을 걸으며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다는, 십여 세기 동안 순례의 길로 이어져 온
산티아고 가는 길. 이민 와 살기에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한국 친구들이, 더 늙기 전에 꼭 같이
가보자는 요청에 무작정 달려온 길이다. 온전한 준비도 굳은 마음의 각오도 없이, 뭐 어떻게 되겠지
하는 배짱만으로 이 여행을 택한 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하지만 거미줄처럼 짜여 있던 일상을
벗어나 떠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고 스스로 변명해 본다. 어쩌면 나는 요행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깊은 산 중에 차는 들어올 수 없으니 누군가 소달구지라도 끌고 가면 지친 몸을 얹어
보고 싶다. 그러나 그런 네 잎 클로버는커녕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청아한 새 울음소리가 고요 속의 공기를 가르며 꽂혀 온다. 들꽃이 흘리는 화사한 웃음은 벌과
나비의 날갯짓을 분주하게 하고, 그 밑에 개미의 행렬이 줄지어 이어 간다. 물리적인 도움 없이
어떤 기대나 요행을 바라지 않고, 오직 제 몸뚱이의 발만을 움직여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개미들. 나 역시 문명적인 혜택 없이 원시적으로 걸어야만 한다. 나는 광활한 벌판에 버려진 한
마리의 개미가 된다. 개미들이 볼 수 있는 한계는 어디쯤일까. 개미의 시선으로 보일 만한 거리에
목표를 정한다. 그 장소에 도달하면 또 그만큼의 목표를 둔다. 생각보다 빨리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갑자기 마음이 여유로워지며 더 이상의 조바심도 없어진다. 목표를 향해 줄달음질 치던
마음과는 달리 무겁게 끌려가던 발걸음이 저절로 내닫고 있다.
저 멀리 마을 입구가 보인다. 몇백 년의 세월이 묻어 반들반들 윤이 나는 돌로 이루어진 육중한
중세의 다리와 날렵하게 쭉 뻗은 현대식 다리가 공간을 두고 나란히 놓여 있다. 밑으로 유구한
역사를 품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타오르는 노을에 얼굴을 맞대며 반짝이고 있다.
오늘 하루 32km를 걸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오늘이 열 닷새째 걷는 날이고 그중
가장 거리가 먼 구간이기도 하다. 나는 왜 이 길을 오게 되었나 스스로 질문해본다. 노력했던
일들의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재빨리 이유를 만들어 포기해 버리는, 부족한 인내력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나. 어려운 벽에 부딪히면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고 마는, 약한 의지를 일깨우기
위해서였나. 그동안 시도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던 일들을 돌이켜본다. 오늘 걸은 것처럼
가시거리를 짧게 두고 낮은 자세로 바라보며 한발 한발을 목표로 삼았다면, 언젠가는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감긴 눈 속에, 끝없이 펼쳐진 들판 사이로 긴 그림자를 끌며
걸어가고 있는 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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