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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밴쿠버 문협 신춘문예 소설부문 가작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7-02-05 00:00

동상이몽

전주현

   “정호야, 정호 어서 일어나거라….”
어디선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노인의 목소리에 정호는 잠에서 깨었다. 허공에 메아리쳐 들리는 어딘지 실제 같지 않은 목소리였다.
정호는 졸린 눈을 게슴츠레 뜨고 어두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반쯤 감긴 눈꺼풀 사이로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분이 정호의 발치에 서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노인은 고운 한복 차림에 커다란 지팡이를 짚고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호는 기겁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엇, 누, 누구세요?”
“예끼, 이놈아, 네 증조부도 몰라보냐?”
“예에?”
“잔소리 말고 어서 따라오너라.”
그런 다음 노인은 돌아서서 방문으로 걸어갔다. 어젯밤 분명히 꼭 닫아 놓은 방문이 활짝 열렸고, 마루의 불빛이 환하게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정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 환상을 보고 있는지 구분을 할 수가 없어서, 허벅지를 한번 꼬집어보고 양쪽 눈을 번갈아 비벼보았다. 허벅지는 아팠고, 눈은 낮 시간만큼이나 또랑또랑했다. 그러나 방 문 앞에는 여전히 그 노인이 서 있었다. 신선들이 사용하는 것 같은, 머리 부분이 구름 모양으로 구부러진 지팡이에 턱을 괴이고 구부정하게 서서 정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이 어찌나 형형한지,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 별이 두개 뜬 것 같았다. 그는 몇 번 눈을 껌벅거리다가 옆에서 자고 있던 아내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여보, 여보, 일어나봐.”
그러나 아내는 귀찮다는 듯이 뒤척이기만 할 뿐,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이놈아, 할애비 말을 뭘로 아는게야? 어서 발딱 일어나 따라오지 못하겠냐?”
노인의 성난 목소리가 어두운 방안에 메아리쳐 울렸다. 정호는 놀라,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호가 일어나는 것을 보자, 노인은 다시 돌아서더니 바람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정호는 엉거주춤하게 그 자리에 선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에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던 아내가 어찌된 기색인지 노인의 쩌렁거리는 목소리에도 죽은 사람처럼 꼼짝을 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여보, 여보, 일어나봐!”
노인을 따라가는 대신, 정호는 아내의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그러나 아내는 마치 통나무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할뿐 반응이 없었다. 숨소리나 맥박 소리 모두 정상이었지만, 아내는 결코 눈을 뜨지 않았다.
“여보…!”
그 때였다. 거실에서 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이 지팡이로 마루를 내리찍는 소리였다. 그리고 곧이어 노인의 호통 소리가 집 안에 쩌렁하게 울렸다.
“네 이놈! 빨리 나서지 못하겠느냐!”
“갑니다, 할아버지, 가요.”
정호는 잠들어 있는 아내를 뒤돌아보며 힘겹게 방문을 나섰다. 거실에 나와 보니 노인은 이미 현관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새벽에 어딜 가시려고 그러세요? 저기 막걸리라도 드릴 테니 조금 그냥 쉬었다가 가시면….”
정호는 어떻게든 노인을 집 안에 붙잡아 두려고 애썼다. 어릴 때 들은 무서운 얘기가 생각이 나서였다. 꿈에서 죽은 조상을 따라가면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게 된다는…. 그는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풍경이 꿈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죽은 증조부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날 리도 없고, 그가 귀신을 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니, 꿈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노인을 따라나서서는 안되었다. 그렇게 쉽게 세상을 등질 수는 없었다.
“갈 데가 있으니 잔말말로 따라 오니라.”
“할아버지, 제가 저번 제사를 못 지내드려서 화가 난 모양이신데….”
“허, 그 놈 참!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라!”
노인은 한마디로 그의 말문을 막아버리고는 마치 구름이라도 탄 듯이 저만치 그의 앞으로 미끄러져 나아갔다. 열린 현관문으로 차가운 11월 새벽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얇은 면 파자마 사이로 한기가 온 몸에 스며들었다. 정호는 현관문 안과 밖에 발을 걸치고 머뭇거렸다.
‘이대로 문을 닫아버리고 다시 잠자리로 돌아갈까?’
그러나 미처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노인의 지팡이가 그의 팔을 잡아채었다. 엇 하는 소리도 내보지 못하고, 그는 그대로 집 밖으로 끌려 나갔다. 쾅 하고 현관문 닫기는 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날카롭게 울려왔다.
바깥에는 살얼음이 얼어 있었다. 겨울을 알리는 찬바람이 그의 귓가에서 윙윙 소리를 내었고, 가로수에는 이제 ‘마지막 잎새’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하얀 입김을 호호 내뿜으며 노인의 뒤를 바쁘게 따라갔다. 그의 피부는 꽁꽁 얼어서 감각이 무뎌졌고,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발은 빨갛게 얼다 못해 이젠 보라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입과 턱은 꽁꽁 얼어붙었고,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말소리 대신 다다닥 하는 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노인은 이런 정호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팡이로 정호의 팔을 굳게 옭아매고 서울 시내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뛰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니었다. 날아다닌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었다. 그러더니 처음 보는 어느 으리으리한 대저택 앞에서 갑작스레 발을 멈춰 섰다.
보는 순간 정호의 심장은 뚝 하고 멈춰 섰다. 여기가 바로 옥황상제가 사시는 집인 모양이구나. 소싯적의 귀신 얘기를 헛들을 것이 아니었다. 전부 사실이었다. 이대로 이 집에 들어가면 다시는 살아서 내 집에 발 디딜 일은 없을 것이다.
‘아내가 제사상은 잘 차려줄까?’
속에서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렸다.
“아이고, 할아버지. 여기가 어딥니까…. 여기가 바로 그….”
“네 집이다.”
“예? 제, 제 집이요?”
“옜다, 받아라. 이 집 열쇠니라.”
노인은 한복 소매에서 큼지막한 열쇠 꾸러미를 꺼내어 정호에게 건네주었다.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법한 큼지막한 놋쇠 열쇠들이었다. 그가 엉겁결에 열쇠를 받아들자 노인은 다시 돌아서더니 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정호는 열쇠를 들고 잠시 망설였다. 속임수일지도 몰랐다. 신난다고 열쇠로 따고 집에 들어갔다가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천왕에게 잡혀서 그 길로 그냥….
그래서 열쇠로 문을 바로 따는 대신에, 그는 먼저 열쇠 구멍으로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당은 말끔하게 쓸어져 있었고, 마당 뒤로 보이는 본채는 경복궁, 아니 자금성보다 더 화려해보였다.
그는 열쇠 구멍에서 눈을 떼고 볼을 세게 꼬집어보았다. 아무 느낌이 오지 않았다. 추위에 얼어붙은 탓이었다. 감각이 무뎌진 발가락에 동상이라도 걸린 듯 차가운 통증이 찌르듯이 느껴진 다음에야, 그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집이, 이 집이 내 집이란 말인가?’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턱이 갑자기 떡 벌어졌다. 그는 대문에서 몇 걸음 물러서서 집을 크게 한번 둘러보았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아직도 이런 집이 있었더란 말인가? 이 금싸라기 땅에 이렇게 큰 집이? 그리고 그게 내 거라고?
“이게, 이게 경복궁이지, 집이야?”
크흐흐흐흐. 갑자기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더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파랗게 질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열쇠를 꼭 잡고, 큼지막한 놋쇠 자물쇠에 끼워 넣었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키로는 나갈법한 자물쇠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흥분으로 가슴이 벌렁벌렁 뛰더니 온 몸에 온기가 퍼져나갔다. 추위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는 제 키의 세 배는 될법한 높다란 대문을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힘껏 밀었다. 발 하나 들어갈 만큼의 공간이 문 틈 사이에 드러났다. 그는 다시 한번 대문을 힘껏 밀었다. 조금씩 조금씩, 육중한 대문이 열릴 때마다 문 틈새로 보이는 집 안 풍경에 그는 오금이 저릴 만큼 감질이 났다. 마침내 몸 하나 끼워 넣을 수 있을 만한 틈이 생기자, 그는 냉큼 집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집은 상상을 초월했다. 축구 경기를 해도 좋을 만큼 커다란 마당을 지나면, 연잎이 떠다니는 커다란 일본식 정원이 나왔다. 활짝 핀 연꽃 사이로 형형색색의 잉어들이 가끔씩 고개를 내밀었고, 버드나무들이 기다란 머리채를 호수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정원 한가운데 자리 잡은 커다란 목련 나무에는 때 이른 목련이 한창 꽃을 피웠고, 집 주위는 온갖 종류의 꽃 향기로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십일월에 웬 꽃이 이렇게 많이 피었담?’
그러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저택은 그가 이상하다는 의심을 할 겨를조차 주지 않았다.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지붕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집이었다. 백악관과 청와대를 합쳐 놓아도, 이 집 크기의 반조차 되지 않을 성 싶었다.
집 현관문으로 들어서는 나지막한 계단은 모두 대리석이었고, 계단 손잡이는 황금으로 번쩍였다. 정호는 대리석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행여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밟아 올라갔다. 대문만큼이나 커다란 현관문 앞에 서서 정호는 집의 크기와 아름다움에 또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문에는 고려청자에서나 볼 듯한 화려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손잡이 또한 황금빛으로 번쩍거렸다. 정호가 문으로 다가가자 집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집 안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수 백 점의 동양 산수화들이 커다란 벽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림에 대해서는 백치인 정호였지만, 값나가는 물건이라는 것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현관에서부터 시작된 대리석은 현관 양쪽에 자리 잡은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커다란 테라스에서 서울 시내 경치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게 내 집이라니! 이게 내 집이라니!’
정호는 테라스에 서서 야호를 수도 없이 외쳤다. 그런 다음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서 벽에 걸린 작품들을 하나하나 감상했다. 집 안은 모두 금 아니면 대리석이었고, 정호는 집 안을 다 구경하는 데만도 이틀은 걸리겠다고 생각했다. 거실에 놓인 가구며 장식품들도 고가의 물건임에 틀림없었고, 박물관에서나 보던 고려 청자며 조선 백자 등은 방구석의 쓰레기통만큼이나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이 집 어딘 가에 틀림없이 창고가 있을 거야. 그 안에는 온갖 값진 물건들이 들었겠지?”
그래, 창고를 찾자! 그 안에 틀림없이 이 집의 모든 ‘부’가 숨겨져 있을 거야! 순간 그의 귓가에 누군가가 창고는 집 뒤쪽에 있다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냉큼 계단을 뛰어 내려가 집 뒤쪽으로 달려갔다. 집 뒤에는 네모 반듯한 가건물이 하나 서 있었는데, 허술해 보이는 건물 문에는 커다란 놋쇠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정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노인이 건네주고 간 열쇠꾸러미를 꺼내어 들었다. 열쇠꾸러미는 그새 더 묵직하게 변해있었다. 들어보니 열쇠가 한 백 개는 족히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정호는 그 중에서 제일 맞을 법한 열쇠를 골라 자물쇠에 끼워 보았다. 하지만 자물쇠는 열리지 않았다. 그 다음 열쇠를 꽂아보았다. 역시 맞지 않았다. 매번 열쇠를 꽂을 때마다 그의 마음은 기대와 흥분에서 실망으로 변해갔다. 손가락이 뻣뻣해질 정도로 열쇠들을 다 끼워보았지만 맞는 열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 할아버지께서 주고 가신 선물인데, 맞는 열쇠가 없다니, 그럴 리가 없어.”
정호는 다시 한번 열쇠들을 모두 자물쇠에 맞춰 보았다. 맞는 열쇠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열쇠를 어디 빠뜨린 것이 틀림없어. 정호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서 집 입구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축구장만한 마당을 이리저리 뛰고, 샅샅이 뒤져보고, 정원의 꽃이란 꽃은 다 들춰보며 열쇠를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 노인네가 제일 중요한 열쇠만 빼놓고….”
정호는 안달이 났다. 내가 집 주인인데, 창고를 못 열어 본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는 창고 문을 붙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하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보물 창고가 열리지 않는데, 이 집이 다 무슨 소용이야!”
갑자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괜한 성미에 열쇠 꾸러미를 들어 집을 향해 던졌다. 열쇠 꾸러미는 집의 창문에 정통으로 맞았고 쨍그랑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어졌다. 아차, 하는 찰나, 갑자기 우르르르르 하면서 지반이 울리기 시작하더니 집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호는 너무도 놀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지진이라도 난 듯 좌우로 요란하게 울리는 집을 바라만 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큰 집이. 그 큰 집이!! 무너져 내리는 집을 바라보고 있자니, 정호의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채 십분도 되지 않아, 그 거대한 저택이 장작더미로 변해버렸다.
집이 무너져 내린 자리에서 몇 백 년 묵은 먼지가 구름처럼 하늘로 피어 올랐다. 그는 여전히 입을 떡 벌린 채 하늘로 오르는 먼지 구름을 바라보았다. 맥이 탁 풀렸다.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정호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바로 그 때 먼지 구름 맨 위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씩 먼지 구름이 걷히자, 그 움직이는 물체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이었다. 푸른 용. 중국 벽화에서나 보던 그런 용이었다. 그가 용을 가만 바라보고 있으니, 그 용이 그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용의 얼굴이 그를 향해 다가오는데, 그 콧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릿한 냄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커다란 용의 얼굴, 부리부리한 눈매에 그는 잔뜩 움츠러들어, 눈을 꽉 감았다.
이제 용에게 잡아 먹히는 일은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용이 사람을 먹던가?
지금껏 그 어디에서도 용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생각이 들자, 조금 용기가 솟았다. 그는 조심스레 실눈을 뜨고 용을 바라보았다. 용의 얼굴이 바로 그의 눈앞에 있었다.
여의주!
용과 얼굴을 마주 대하자마자 제일 먼저 정호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여의주였다. 분명 용의 입에는 여의주가 물려 있을 것이다. 여의주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저 집 같은 집은 백 채도 살 수 있다. 그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아래로 내려 용의 입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용의 입에는 여의주대신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창고 열쇠가 물려 있었다.
“내 열쇠!”
그가 소리치자, 용은 성난 표정을 짓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용은 그의 목에 몸을 감고 조이기 시작했다. 목 둘레에 느껴지는 그 엄청난 압력과 무게에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을 아무리 크게 벌려도 단 한 톨의 산소도 폐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공기를 몸 속으로 빨아들였다.
헉, 쌕, 헉, 쌕.
헉!
하면서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여전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마치 돌덩이 밑에 깔려 있는 것 같았다. 내려다보니, 아내의 팔이 그의 목에 턱 올려져 눌러 내리고 있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아내의 팔을 밀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크게 숨을 몇 번 들이 쉬었다. 살 것 같았다. 숨쉬기가 편해지자 그 다음에는 온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오들오들 떨면서 옆을 돌아보니, 아내가 이불이란 이불은 다 끌고 가서 김밥처럼 돌돌 말고 자고 있었다.
“이런 여편네하고는….”
그는 궁시렁거리며 이불을 잡아 끌었다. 간신히 배를 덮을 만큼의 이불이 손에 딸려 나왔다. 그 이불을 배 위에 걸치듯 올려놓고, 그는 베개를 세워 기대어 앉았다.
꿈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생생한 꿈이었다. 그의 콧가에는 아직도 용의 비린내가 선명하게 남아있었고 노인의 지팡이에 잡혔던 팔은 아직도 시리게 아팠다. 아침상 앞에서 정호는 토시하나 빼놓지 않고 아내에게 꿈 얘기를 자세히 늘어놓았다.
“여보, 우리 당장 복권 삽시다.”
“복권 같은 소리하고 있네.”
“무슨 소리예요? 복권 당첨된 사람들 얘기 못 들었어요? 용꿈이나 조상 꿈을 꾸면….”
“꿈같은 소리하고 있네, 진짜. 그 얘기를 믿어? 하여튼 꼭 지 같은 소리만 한다니까. 되지도 않는 복권 살 돈 있으면 내 차라리 그 돈으로 자장면을 사먹고 뱃속에 똥이나 그득히 채워 놓겠다. 하여튼 여편네 생각 돌아가는 꼬라지하고는…. 말을 한 내가 잘못이지.”
정호는 그렇게 한번 퉥 내뱉고, 아침밥을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정호는 언제나 아내의 말에 일단 반대표를 던졌다. 그리고 절대 좋은 말로 반대표를 던지는 법도 없었다. 신혼 때 아내의 ‘기 잡기’ 에 몰두하다 생긴 버릇이었다.
정호의 아내는 정호보다 덩치가 컸다. 키도 머리가 하나 더 있었고, 허리둘레도 그보다 굵었다. 정호는 얼굴도 작고, 키도 160센티가 채 될까 말까 했다. 눈, 코, 입도 조막조막해서 한마디로 볼품이 없었지만, 아내는 달랐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큼지막한 코, 큼지막한 얼굴에, 요즘 식으로 하면 키도 늘씬했다. 하지만 그 때만 해도 여자가 덩치 큰 게 흉이라, 그들이 결혼을 할 때 식장에 모인 하객들이 “여자가 꼭 임꺽정이 같으네,” “여자랑 남자가 바뀌었구먼,” 하며 중얼거리던 소리가 주례 대에까지 들려왔었다.
그래도 정호는 상관없었다. 아내가 여자 임꺽정이란 것이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자기처럼 왜소한 사람이 이렇게 덩치 큰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에 그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자칫 잘못하다간 아내에게 밀려, 남편이라고 허세도 떨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일단 아내 말 무시하고 보기, 무조건 반대하기였다. 그리고 그 효과를 더하기 위해 몇 번 밥상까지 뒤집어엎고 나니, 그 덩치 큰 아내가 그의 앞에서 설설 기기 시작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시골에서 짐 보따리를 들고 상경한 그의 홀어머니의 힘도 컸다. 그 다음부터 정호는 그야말로 기세가 등등해졌다. 아내 앞에서 큰 소리를 치면 칠수록, 정호의 가슴 속에 울분처럼 쌓여있던 외모 콤플렉스는 시원하게 풀어졌다. 처음에 아내에게 가졌던 미안한 감정은 갈수록 옅어졌고, 이제는 받아주기만 하는 아내가 그저 우습게만 보였다.
복권? 하여튼 지 같은 소리만 한다니까.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친 뒤, 아내가 정성스럽게 차려준 아침을 깨끗이 비워 없애고 집을 나섰다.

정호는 그날 잠시도 회사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커다란 저택이 무너지던 그 순간이 계속 눈앞에서 떠올랐고, 그 때 느끼던 절망감이 마치 사실인양 그의 가슴 속을 에이게 파고들었다. 꿈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잠을 설친 탓에 계속 졸음이 쏟아졌고, 잠깐이라도 졸았다 싶으면, 어느새 그 꿈의 단편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분명 보통 꿈은 아니야. 무슨 계시 같기도 하고. 정말 마누라 말마따나 복권이라도 사볼까?’
정호는 힐긋 눈을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하루의 반도 지나지 않았지만, 도저히 일할 기분이 나질 않았다. 점심을 먹으러 나가기에도 이른 시각이라, 그는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로 들어서면서 정호는 어험 하고 괜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짧은 목을 잡아끌고 허리를 쭉 폈다. 지난달에 상무로 승진하고 나서부터 휴게실에 들어설 때마다 반드시 거쳐야만 할 의례가 된 행동이었다. 그러면 삼삼오오 모여 얘기하던 직원들이 “어이구 상무님”하면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거나, 알아서 커피도 뽑아다 주곤 했다. 한번 대접 받는데 익숙해지니, 하루라도 대접을 받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모여 있던 직원 중 한 명이 커피를 뽑아준 커피를 받아 들고, 정호는 괜히 그들 주위를 기웃거렸다.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재미있게 하나?”
상무라는 직책이 뭔지…. 덩치는 산만한 이십 대 직원이 정호의 눈치를 슬슬 살피다가 어색하게 말문을 열었다.
“별건 아니고요…, 이번에 로또 복권이 당첨금이 160억이라고 해서….”
“그래서?”
“저희들이 돈을 모아서 같이 복권을 여러 장 사자고 얘기 중이었어요.”
“복권? 복권이 그리 당첨이 쉽게 되나?”
“혹시 모르니까요.”
옆에 있던 인턴사원이 얼른 끼어 들었다.
“예끼, 젊은 사람들이 요행이나 바래서야…. 젊은 사람은 꿈을 가져야지.”
“복권 당첨도 꿈이 아닌가요?”
“그게 무슨 꿈이야? 한탕주의지. 젊은 사람들이 앞을 멀리 보고, 야망을 품어야지, 복권 같은데다 돈을 쓰나? 복권 살 돈 있으면 차라리 자장면이나 사먹고 힘내서 공부나 하게. 그래야 성공하는 거야!”
“예, 상무님.”
정호는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고, 목을 빳빳이 쳐든 다음에, 커피를 홀짝이며 돌아섰다.
당첨금이 얼마라고? 백 육십억?
큰 소리는 쳤지만, 사실 귀가 솔깃했다. 가끔 휴게실에 와볼 필요가 있었다. 직원들이 하는 얘기를 엿듣는 것만으로도 얻는 정보가 어찌나 많은지. 정호가 평생 라이벌이었던 최 부장을 제치고 먼저 상무자리에 오른 것도, 다 휴게실 정보 덕분이었다.
백 육십억이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복권을 사지도 않았는데, 손에서 돈 냄새가 풍겨왔다. 정호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수표 뭉치를 한 장 한 장 젖히는 시늉까지 해보았다.
으흐흐흐흐
정호의 입가에서 야릇한 웃음이 스며 나왔다. 그는 채 식지도 않은 커피를 쓰레기통에 힘차게 던져넣고,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그는 얼른 길을 건넜다. 그런 다음 요리조리 골목길을 돌아 아무도 찾지 못할 것 같은 구석진 구멍가게를 찾아들어갔다.
“로또복권 주세요.”
“얼마어치나 드려요?”
“한 이십 만원 어치만 주쇼.”
주인은 다행히도 별 말도 없고,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별 얘기도 하지 않고, 물어보는 말도 없이, 묵묵히 복권 이백 장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기계에서 뽑아내었다.
“당첨 발표는 언제 합니까?”
“오늘 저녁이라는 것 같던데….”
주인은 백 원짜리 껌만큼이나 관심이 없다는 투로 대답을 하고는 두둑한 복권 다발을 정호에게 건네주었다. 정호는 무슨 암거래라도 하는 사람처럼, 주위를 몇 번 둘러보고는 얼른 복권 다발을 양복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뚱하니 쳐다보는 가게 주인을 뒤로 하고, 정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시치미를 뚝 떼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문을 꼭 닫고 사무실에 혼자 앉아서 정호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수도 없이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일은 이미 손에서 완전히 놓아버렸고, 초조하게 의자에 앉아,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시계만 바라보았다. 1초가 1시간 같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시간이 도무지 가질 않았다.
도대체 이 시간을 어떻게 때워야 할까.
그 질문을 던지자 해답이 금방 나왔다. 160억을 어떻게 쓸 건지 계획을 세워보자.

정호에게 있어서, 복권 당첨은 기정 사실이었다. 꿔야 될 꿈은 다 꿨으니, 복권에 당첨 안 되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용도 나왔겠다, 조상이 큰 집 열쇠도 줬겠다, 무너져 내렸건, 어쨌건, 땅은 내거 아닌가? 정호는 혹시 바깥에 앉아 있는 비서가 들을까, 입을 가리고 흐흐흐흐 웃음을 흘렸다.
백 육십 억. 평생 써도 써도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돈으로 제일 먼저!
제일 비싼 집을 사자!
그렇잖아도 어디 땅값이 뛰었네, 아파트 값이 뛰었네, 소리에 배가 아프던 차였다. 이 기회에 보란 듯이 금싸라기 땅에 금싸라기 아파트를 사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다이아몬드 싸라기 값에 팔아 넘겨야지.
백 육십억이 이백 억으로 불어나는 소리가 귀에서 짤랑 짤랑 울려왔다.
‘돈을 써볼랬더니, 이거 돈이 더 늘겠는걸.’
정호는 입가에 실없는 웃음을 띄웠다. 기분이 좋았다. 자식이라도 있으면 돈이라도 물려주고, 유학이라도 보내서 써서 없앨 텐데, 자식도 없으니… 자식을 생각하니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절로 났다. 어머니, 못난 자식 하나 키우시려고 평생 생선 구워 팔며 고생만 하신 어머니. 살아생전에 잘 해드리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한 해만 늦게 돌아가셨어도, 백 육십억이라는 돈으로 얼마나 호강을 시켜드렸을까. 그 생각을 하니 가슴언저리에 쐐기라도 박힌 양, 가슴이 찌릿하게 아려왔다. 좋은 옷도 못 사드리고, 좋은 음식도 못해드리고, 좋은 곳도 못 보여드리고….
그 생각을 하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던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저 불효자는 울 뿐이었다. 한번 어머니를 생각하니 생각이 줄을 이어 멈출 수가 없었다. 특히나 마지막에 노환으로 고생하시던 것을 생각하면 더더구나 가슴이 아팠다. 똥오줌도 못 가리고, 하나뿐인 자식도 못 알아보시던 어머니. 장작개비처럼 비쩍 마르고 주름이 자글자글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자, 정호의 입에서는 ‘어머니!’ 하는 절규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모습 곁에 항상 있던 한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름 아닌 아내였다. 군소리 하나 없이, 심지어 정호도 감히 손대기가 꺼려졌던 어머니의 배설물을 다 닦아내던 아내. 어머니가 어떤 심한 말로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구박을 해도 눈만 내리깔 뿐, 말대꾸 하나 할 줄 몰랐던 아내. 아이를 못 낳는 이유가 바로 정호 자신에게 있었는데도,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고서도 입 한번 벙긋하지 않던 아내.
그런 아내의 모습이 떠오르자, 정호의 가슴은 다시 묵직해졌다. 이번에는 가슴이 아리는 그리움과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으로 가슴이 쓰려왔다.


돌이켜보니, 정호는 아내에게 단 한번도 잘 해준 적이 없었다. 아내에게 곰살맞게 구는 행동 자체가 어딘지 어색하고 닭살스러웠다. 덩치는 작아도, 어머니에게 ‘사내는 이래야 한다’ 라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란 터라, 닭살 맞는 애정 표현도, 정다운 말 한마디도 건넬 줄을 몰랐다.
아내 기를 잡는다고, 툴툴거리고, 밥상이나 엎어봤지, 생일을 챙겨준 적도, 기념일을 챙긴 적도 단 한번도 없었다. 십 오년을 같이 살면서, 목걸이 한번 사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아내는 불평한마디 하지 않았다.
아침이면 새로 지은 따끈한 밥이 밥상에 차려져 있었고, 아침에 아무리 호된 말을 퍼붓고 가더라도, 저녁이면 뜨끈한 찌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흠을 잡을래야 잡을 것이 없는 아내였다. 기를 잡을 필요도 없는 아내였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정호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탄식을 했다. 하지만 늦지 않았다. 어머니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도 아니었고, 오늘부터라도 아내에게 잘 하면 된다.
아니, 이 복권만 당첨되어봐라, 백육십억? 아내를 다 주어도 모자를 지경이지.
아냐, 한 육십억은 아내를 주고, 내가 한 백억을 갖지 뭐. 아냐, 아내가 돈 쓸 일이 뭐가 있어? 밖에서 도는 내가 아무래도 돈 쓸 일이 더 많으니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아내에게 돌아갈 몫은 점점 줄어들기만 했다. 그래도 정호의 가슴은 뿌듯함으로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당첨금으로 아내 모피 코트를 하나 뽑아주고, 새로 산 금싸라기 아파트로 착 데리고 들어가면 아내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겠지. 그런 다음, 유럽 일주를 함께 돌고나면, 아내는 모든 것을 용서해주겠지. 아니, 이미 용서했는지도 몰라. 마음이 넓은 여자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지금까지 나한테 그렇게 잘 할 수가 있겠어.
정말 대단한 여자야, 우리 마누라, 안영숙이는. 마음도 넓고, 인물도 나보다야 훨씬 낫고, 또 우리 어머니한테도 얼마나 잘했어? 그러고 보니 난 참 복이 많은 놈이야.
정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복 많은 놈. 그 말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 ‘복 많은 놈’이라는 말이 정말 복을 가져와서 복권에 꼭 당첨이 될 것 같았다.
‘틀림없어! 난 당첨이야! 당첨이라고!’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오니, 집 안은 향긋한 저녁 식사 냄새로 그득했다. 정호는 따스한 밥 내음을 맡으며 아내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예전에 젖살이 통통하게 올랐던 얼굴에는 이제 하나씩 주름이 지기 시작했고, 임꺽정이 눈이라고 불리던 그 부리부리한 눈은 조금씩 아래로 쳐져서 예전의 눈매보다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 순간 아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가슴이 시려왔다. 자식 하나 없어도, 정호에게 늘 집이라는 안식처를 만들어 주는 아내. 정호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으로 저도 모르게 손을 앞으로 뻗었다. 밥 그릇 옆에 놓인 아내의 손이라도 한번 잡아주려고.
그런데 아내는 버릇처럼 정호의 내민 손에 물 컵을 쥐어주고는 다 먹은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다음 그제야 정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밥풀?” 하고 물었다.
하여튼 눈치코치라고는!
“안 묻었어!”
도대체 박자라고는 맞지가 않았다. 정호는 무안함과 괜한 심통에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내는 아침처럼 뚱한 표정으로 정호를 바라보고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설거지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호의 마음은 다시금 무거워졌다.
‘아냐, 복권만 당첨되면, 그 때는 정말 잘 해줄 거야.’
그렇게 미안한 마음을 떨쳐버리고, 정호는 보통 때처럼 텔레비전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날 밤, 아내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자, 정호는 자리에서 살그머니 일어났다. 어두운 방 안에서 양복 안주머니를 뒤져 복권 다발을 꺼내들고, 그는 컴퓨터가 있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  컴퓨터 전원이 들어오고, 인터넷 화면이 뜰 때까지 채 오 분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그는 수도 없이 심호흡을 하고, 작은 방 안을 이리 저리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마침내 로또 복권 웹 사이트가 눈앞에 떠오르자, 그의 심장은 멎는 것 같았다. 한쪽 구석에 커다랗게 씌어진 오늘의 당첨 번호를 보자 숨까지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안돼, 안돼. 복권도 못 맞춰보고 죽을 수는 없어.’
그는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추스르고 복권의 첫 장을 펼쳐 들었다.
‘1, 4…. 이건 꽝이네?’
첫 장부터 맞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실망을 하지 않았다면 그도 거짓말이었다.  그는 다시 두 번째 장을 펼쳐들었다. 두 번째도 역시 꽝이었다. 그렇게, 석 장, 넉 장 나가다보니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복권을 맞춰보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백장을 넘기고 나서부터는 아예 화면에 나와 있는 번호를 확인할 필요도 없어졌다. 번호를 다 외워버렸으니까.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니 이제 그 많던 복권 무더기 중에 단 한 장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그 한 장에 모든 기대와 희망을 걸었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히 맞는 복권이 꼭 하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복권이 바로 이 마지막 한 장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그는 눈을 부릅떴다가 다시 질끈 감았다. 이 복권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래도 떨리는 가슴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정호는 심호흡을 크게 몇 번 들이쉬었다. 그리고 나서 떨리는 심장을 잡아보기라도 하려는 듯, 손으로 가슴을 꼬옥 눌렀다.
마침내 정호는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 화면을 응시했다.
‘2, 7, 15, 26, 34, 45’
마음속으로 당첨 번호를 크게 한번 읽어 본 다음, 마지막 복권을 손에 펼쳐 들었다.
‘1, 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말도 안돼!
정호는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당첨은 기정사실이었다. 당첨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정호는 두 눈을 손으로 박박 비벼보고 다시 번호들을 확인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그 많은 복권 중에 단 한 장도 맞는 번호가 없었다. 심지어 천 원 한 장도 당첨된 것이 없었다!
‘이, 이건 말도 안돼!’
온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복권을 쥐고 있던 손이 바르르 떨리더니, 마지막 복권 한 장이 파르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내가 잘못 본 게 틀림없어.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틀림없어!’
정호는 책상에 흩어진 복권들을 손으로 다시 긁어모았다. 그런 다음 하나씩 펼쳐들고,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맞는 번호가 단 한개도 없었다.
‘날짜가 틀린 거야. 그 가게 주인이 틀린 날짜 복권을 준 게 틀림없어.’
하지만 날짜는 틀림이 없었다. 
‘분명히 뭔가 잘못 된 게 틀림없어.’
동이 터올 때까지 정호는 복권을 또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눈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토끼처럼 빨갛게 충혈이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호는 두 번, 세 번, 네 번, 백 번이나 복권 당첨 번호를 확인했다.
삐리리리리
안방에서 요란스럽게 자명종 시계가 울렸을 때에야, 마침내 정호는 당첨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침상 앞에서 정호는 아내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가 없었다. 괜히 눈이라도 마주쳤다가 눈이 왜 빨갛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말이 없어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아내에게 미안해서였다. 복권에 당첨되면, 그동안 고생만 한 아내, 정말 호강시켜주려 했는데, 억울하고 화가 치밀었다. 복권에 쏟아부은 이십 만원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속이 아팠다. 그런 정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밥을 푸자마자 아내는 당장 돈 얘기부터 꺼냈다.
“장 보러 가게 돈 좀 줘요, 여보.”
“뭔 장을 또 봐? 어제 봤잖아?”
“어제 돈이 모자라서 물 좋은 대구가 들어왔는데 못 샀어요. 당신 대구탕 좋아하잖아.”
“대구 같은 소리 하네. 됐어. 안 먹으면 그만이지.”
정호의 대답에 아내는 시무룩하니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정호는 속이 상했다. 그 놈의 복권만 사지 않았더라도, 아내한테 이십 만원 그냥 턱 꺼내 줄 수 있었는데. 그저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맛있는 걸 해주려는 아내의 마음이 고마워서라도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서 내밀어주고 싶었는데, 정호의 지갑 속에는 교통 카드 하나가 고작이었다. 복권이 당첨됐더라면, 대구 백 마리라도 사오라고 뭉칫돈을 쥐어주었을 텐데.
정호는 시무룩한 아내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지만, 위로의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고 차마 겉으로 나오지 못했다.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정호는 집을 나섰다. 오늘은 집에 가서 아내에게 잘 해줘야지. 아니, 아예 내가 대구 한 마리를 사들고 집으로 가야지. 아냐,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더라? 아내가 먹고 싶다는 건 오늘 내가 무조건 사줘야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정호는 발걸음도 가볍게 출근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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