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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 2019.12.11 (수)
글을 한 편 쓰면 아내나 아이들에게 슬며시 한 번 읽길 청한다. 반응을 보고 싶어서이다. 영국의대시인 쉴러도 밤새워 한 편의 시를 쓰면 가정부에게 읽게 하고 소감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시를모르는 가정부가 비평가의 안목일 수는 없으나 가정부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면 좋은 시가 되지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몇 번이나 고쳐 썼다고 한다. 가족에게 글을 한 번 읽어 주길 청할 때, 첫 번째 독자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정목일
2019.08.26 (월)
심심하니 껌이나 씹어볼까. 여행하기 전에 가끔 껌을 사기도 했다. 입에 넣으면달콤해진다. 간편한 위안이다. 스트레스도 씹어본다. 딱딱, 쩍쩍, 그냥 심심풀이다. 사실심심풀이란 심오한 말이다. 잡다하고 혼탁한 마음을 풀어본다는 것이니, 그런 경지가 되려면명경지수(明鏡之水) 같은 심사가 돼야 한다. 마음의 때와 얼룩을 깨끗이 씻어내 영혼이 비춰보여야 한다. 마음에 매화 향기가 나야 한다.그냥 껌을 씹는다. 아무 생각 없이 입을 움직인다....
정목일
봄의 촉감 2019.04.04 (목)
(1) 수양버들누가 가야금을 뜯고 있다.맑은 진양조(調) 가락이 흐른다. 섬섬옥수가 그리움의 농현(弄絃)으로 떨고 있나 보다.숨죽인 고요 속에 번져 나간 가락은 가지마다 움이 터서 파릇파릇 피어나고 있다.누군가 촛불을 켜고 있다.마음 한 가운데 촛불은 바람도 없이 파르르 떨고 있다. 뼈와 살을 태워서 한 줄기 빛이길바라고 있다.깊은 밤중에 한 땀 씩 수(繡)를 놓고 있다. 바늘귀로 임의 얼굴을 보며, 오색실로 사랑을물들이면 별이 기울고 바람이...
정목일
하늘이 잿빛으로 내려와 있다. 버스정류장에 벌써 몇 대의 버스가 서고 지나갔지만 마을 앞엔 한 사람도 내리지 않는다. 도로 위에 돌개바람이 불어 먼지와 티끌들을 공중으로 말아 올린다. 겨울의 황량한 바람이 스쳐가고 있다.'어쩌면 첫눈이 내리려나?’숙이는 창문에 눈을 대고 바깥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감나무와 대추나무가심하게 흔들리며 바람 소리를 낸다. 참새 떼들이 몸을 떨며 공중으로 사라진다.숙이는 교회당에 가기 위해...
정목일
새해인사 2019.01.08 (화)
새해에는 평범함의 은덕을 알게 해 주소서 사소함의 기쁨을 알게 해 주소서 그 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의 손을 잡게 해 주소서 보통의 즐거움을 갖게 해 주소서 풀꽃들과 대화하게 해 주소서일상의 발견과 이 순간의 깨달음을 얻게 하소서 떠오르는 해돋이처럼 경건하게 하루를 맞이하고 지는 해넘이처럼 장엄하게 하루를 장식하게 하소서 나무처럼 하루하루를 살게 하소서
정목일
한지방문 2018.11.02 (금)
우리 나라 아침은 한지 방문으로부터 온다.희끄무레한 여명이 물들어 있는 한지 방문을 보면서 아침이 온 것을 알게 된다. 한지 방문은정결하고 고요롭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밝아오는 아침의 서기와 명상이 어려 있다.유리창처럼 빛을 투과하지 않고 머물게 하는 것은 한지 방문밖에 없을 듯하다. 아침 빛을맞아들이고 그 표정을 보여줌으로써 평화와 맑음을 준다. 한지 방문은 빛을 품어 광명을 안게 한다. 지난날의 어둠과 근심을 지워버리고 새...
정목일
달 항아리 2018.07.09 (월)
  달 항아리를 보면 달빛의 맑은 도취 속에 빠진다. 달빛 속의 미인이나 꽃은 더 어여쁘고 향기롭다. 햇빛은 사물의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지만, 달빛은 마음까지 닿아 오는 여운(餘韻)을 준다.  달 항아리를 보면 불현듯 조선 중엽의 달밤 속에 있는 듯하다. 달은 농경시대에 우주의 중심, 마음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농사일이나 살아가는 일이 달의 주기에 맞춰 이뤄졌다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달은 해보다 유약해 보이지만,...
정목일
신록의 계절 2018.03.20 (화)
우리나라 사월 중순부터 오월 중순까지 한 달쯤의 신록기(新綠期)엔 그 어떤 꽃들도 빛날 순 없다. 색채나 빛깔에 신비, 장엄, 경이라는 왕관을 씌운다면 꽃이 아닌 신록에만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장미, 모란, 국화, 튤립 등은 화려, 우아, 매혹, 황홀이란 공주가 쓰는 관쯤이면 될 것이다. 신록은 신이 낸 빛깔이어서 스스로 햇빛을 끌어당기고 향유를 바른다. 신록은 탄생의 빛깔이다. 볼 때마다 빛깔들이 꿈틀거리고 새로워진다. 산이 국토의...
정목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