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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림자 2020.06.15 (월)
강가에 쪼그려 앉아 물소리 듣는다은하에서 돌아 나와 강물 속에 이르는 길잠들지 못하는 물고기들이달꽃 흐르듯 물결 짓는다물고기 울음소리인가달빛 울음소리인가지느러미 파닥이는 소리에내 귀청 한 쪽이 무너진다강가에 쪼그려 앉아 나를 듣는다먼 길 돌아온 길, 돌아가야 할 길아득한 날개로 달에게 묻는다강물도 달빛도 말이 없다하얗게 부서지는 별 꽃처럼둥둥 홀로 떠가는 둥근 입술 하나신들이 놓고 간 죄의 씨앗 하나침묵의 신들이 하얗게...
이영춘
동화목(冬花木) 2020.03.09 (월)
                                                옷 한 벌 입지 않은 맨몸으로 빈들에 서서 떨고 있는 저 엄숙한 침묵, 시린 발, 시린 몸, 웅크리고 제 몸 비벼 봄을 틔우고 있는 저 심지의 환한 불길, 내가 가만가만 그에게 다가가 살짝 귀 대어 들어 보니 벌컥 벌컥 물 마시는 소리, 그 뜨거운 생불生佛의 열기 확, 내 몸에 불을 당긴다  
이영춘
가을 철암역 2019.10.07 (월)
오후 세 시의 그 꼭지점에서햇살이 길게 모로 누우면철길 저 너머에서 세 시를 알리는 기차는푸우-푹-푸우-푹 흰 연기를 토하며 달려오고열세 살 그 소녀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혹 먼 이방의 한쪽 문을 그리워하듯산비탈 조그만 쪽문을 향해 아슬히 눈 멈추곤 했는데어느 날 도시락을 싸 들고 우리들 창자보다 긴 터널로 떠난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공복인 듯 탄가루 먹은 하늘은 검은 연기로 쏟아지는데전설처럼 푹푹 쏟아져 내리는데아버지...
이영춘
겨울 편지 2019.01.04 (금)
흔들리는 바람의 가지 끝에서셀로판지처럼 팔딱이는 가슴으로 편지를 쓴다만국기 같은 수만 장의 편지를 쓰던 그 거리에서다시 편지를 쓴다그대와 나 골목 어귀에서 돌아서기 아쉬워손가락 끝 온기가 다 식을 때까지한 쪽으로 한 쪽으로만 기울던 어깨와 어깨 사이그림자와 그림자 사이그림자처럼 길게 구부러지던 길모퉁이에서뜨겁고 긴 겨울 편지를 쓴다오늘은 폭설이 내리고 대문 밖에서 누군가 비질하는 소리그 소리에 묻혀 아득히 멀어지다가...
이영춘
뿌리 2018.10.22 (월)
산 능선에 올라 앉아산 아래 바닥을 생각한다바닥은 하늘이 된다는 것을오르지 못한 것들의 바닥은 뿌리가 되고뿌리들은 땅의 기운이 된다는 것을오늘 하늘 능선에 올라 와서야 비로소 알았다어느 날 태백산에 올라와서야 알았다환웅은 바닥을 행해 내려온 하늘의 아들이라는 것을웅녀는 하늘을 받아 안은 땅의 딸이라는 것을하늘과 땅 두 손뼉 마주쳐 불꽃 튀는 사랑으로탄생된 제국,제국은 곧 바닥의 뿌리들이 모여 사는 곳바람의 숨결들이 모여...
이영춘
싸리꽃 핀다 2018.07.30 (월)
유월, 싸리꽃 핀다 어머니가 핀다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싸리재 언덕,어머니 오르며 산나물 뜯던 산비탈 언덕, 먼 산 중턱에서 나물 보퉁이 이고아지랑이 가물가물 어머니 싣고 온다 목숨 줄 가랑가랑 9남매 북두칠성에 맡기시고, 어머니 비바람 허리춤에 감추시고 싸리재 오르신다 싸리재 오르시다 싸리꽃 무덤이 된 어머니, 어머니 마른 정강이에 먼 산 뻐꾸기 목놓아 운다 울며 간다 나도 어머니가 아파 운다 오늘 밤 그 어머니 소식...
이영춘
떡보 / 우주 한 채 2018.07.04 (수)
김혜진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금요일 이른 아침 딸네미 등교시킨 후, 한인 상점에서 주간신문들 챙기고 간단한 장도 보고 돌아온 남편이 뭔가를 내 앞에 내민다. 밥 대신 떡을 즐겨 먹을 정도로 떡보인 나를 위해 “ 당신 떡 먹은 지 좀 됐지?”하며 모둠 떡과 백설기, 찰떡을 내미는 거였다. 남편의 작은 배려를 고마운 마음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련한 추억이 가을비를 타고 가슴에 스며든다. 내가 여중생이었을 때 엄마 손을 잡고 외할머니를...
김혜진 / 이영춘
지구 별 뒤편 2018.05.07 (월)
저기 저 등 구부리고 가는 이 누구인가그의 어깨엔 알 수 없는 그늘이 걸려 흔들리고강물 소리 강 언덕 저 너머로 멀어지는데길 잃은 새 떼들 겨울하늘에 원 그리며 간다나는 세상 안에서 세상 바깥에서문득문득 오던 길 되돌아보지만거기엔 움푹움푹 파인 발자국뿐발자국엔 빗물 같은 상처만 고여 길을 내고 길을 지운다풀잎 같은 목숨, 이 광활한 우주 한복판에서 먼지처럼 밀려가고 밀려오는 생, 생의 어깨들나는 어린 왕자 같이 마지막 지구별을...
이영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