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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란(托卵)* 2020.05.26 (화)
아침에 일어나보니 책 보따리가 또 사라졌다. 이건 분명히 할머니 짓이다. 이른 새벽이지만 어제저녁 쌓아 둔 책 보따리를 찾으러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집 안에는 어차피 더는 숨길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까. 벽장에서, 헛간에서, 사랑방에서 며칠째 찾아냈으니 오늘은 할머니가 밖에다 내버리신 게 분명했다.“여태껏 배웠으면 됐지, 무어 그리 배울 게 많나. 학교는 인제 그만 다녀라.”  할머니가 잔소리하실 때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가족을...
박병호
늘 푸른 미니스쿨의 첫 수업 (下)       (*2019-10-07에서 계속)                                                              “시간의 가치는 나이에 따라 다릅니다. 몸은 아직 작아도 청년기의 꿈이 실린 5년은 장년기의 30년보다 긴 시간입니다. 지금은 와닿지 않겠지만 여러분이 내 나이쯤 되면 그때야 50년 전의 이 말이 폐기처분...
박병호
   “헬로 에브리원! 마이 네임 이즈 H. 청년기의 황금 같은 5년, 캐나다 각 분야 지도자를 소리 없이 양성하기 위한 이곳에서 함께 뒹굴 제군들의 첫 수업을 맞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17대1, 세 단계의 어려운 관문을 뛰어넘은 호기심 가득한 여러분들을 위한 이 수업은 푯대를 향한 문학적 접근이 아닙니다. 수천 년 전의 수사학적 접근을 현대에 시도하는 실전 훈련입니다. 다음 주 이 시간에 표현 가능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질문과...
박병호
나팔꽃이 순식간에 흰 꽃망울을 터뜨린 어느 아침이었습니다. 전날 밤 제법 큰 줄기의 빗물에도 먼지 땟국이 깨끗이 지워지지 않은 창가에 누워 잠꾸러기 필립이 늦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나팔꽃의 어서 일어나라는 속삭임이 창틈으로 스며든 바람에 실려 왔습니다. 초여름 햇살 아래서 잠이 깬 필립이 눈을 비비며 자연 선생님인 아빠를 찾았습니다. “아빠 선생님! 오늘 유칼립투스 위 코알라 보러 가자고 했지요?”  비온뒤 죽순처럼 키가 쑥쑥...
박병호
배가 두 번 연거푸 급충돌하는 순간 여인의 상·하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뒤틀리며 사춘기 무렵 틀어진 골반이 바로잡혔다. 여인은 욕지도 주민 숙원이었던 공중목욕탕 사업을 해결한 통영 시장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자기 의지 없이 죽음의 바다에 내던져진 사람들에게 마음이 쏠려 오래가지 않았다. 서서히 생명들이 죽어가는 바다에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사라지고 폐허와 같은 정적만이 떠돌았다. 무관심이라는 죽음의 정적도 이보다...
박병호
그해 3월 첫 장날은 찬 공기가 남아 있어도 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화창했다. 따뜻한 희망을 품은 남풍이 부는 바다는 은빛 물결로 잔잔했다. 짙푸른 물이 물결치며 만든 새파랗고 신비로운 색상들이 고흐의 ‘몽마주르의 고귀한 석양 하늘’을 떠올렸다. 꿈을 안고 떠나는 사람들을 설레게 만드는 부두에는 남해 섬들과 통영을 오가는 30톤 여객선 하나가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빛바랜파랑과 때 묻은 흰색이지만 태평양 횡단에나 어울릴 이름을...
박병호
(전 호에서 계속)이윽고 두 남자는 서로 다른 색깔의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아침, 어서 먹고 출발합시다. 안 먹으면 갈 수 없어요. 든든히 드세요. 배 고프지 않아도 먹어야 해요.” 이사벨이 상기된 입가에 웃음을 띤채 말했다. 그들은 어느 한가한 편의점에서 세월을 마시듯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마지막이 될지모를 통나무집에서의 시간을 빨리 흘러보내기 싫었다. 누크에 도착하기까지 배를 울렁거리게 만들 배 안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기나...
박병호
그린란드<2> 2018.02.05 (월)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청마는 우연의 일치 치고는 기막힌 일치라고 생각했다. 이사벨이 3개 국어를 말하는데 모두가 그가 꿈에 그리던 언어였기 때문이었다. 덴마크어, 영어, 그리고 그린란드어. 그의 아내는 남편에게 좋은 친구가 생겼다는 자체는 환영했으나 걱정거리 하나는 남겨두었다. 그녀가 자기 자리를 위협할 사람이 아니라는 남편의 암시는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감정표현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남편의 태도는  완전한...
박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