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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춤을 ‘혼이 훨훨 날아다니는 것 같다’고 했죠”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7-07-06 00:00

전(前) 무용가, 현(現) 밴쿠버 가정문화원 무용강사 김문경씨

◆ 한국 무용계의 거목 김백봉 선생의 제자

◇ 밴쿠버가정문화원에서 무용반을 개설하고 교민들과 자녀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한국무용을 가르칠 계획인 김문경씨. 마침 대학에 인터넷으로 신청한 서류가 한국에서 막 도착했다며 개봉한 성적증명서에는‘A’가 수두룩하다. 코퀴틀람센터 산 중턱 아담한 집에서 몸이 불편한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 조용히 살고 있다.

“아주 아주 열심히 했지요. 내가 경희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있을 때 그 애가 3학년인가 4학년 즈음에 저를 도와서 제 책 ‘봉산 탈춤’을 함께 만들었고, 내가 가르쳤다기보다 타고난 무용가이지요. 수도 없는 제자가 있지만 창분이처럼 특별했던 제자는 그리 많지 않아요. 작년에 잠깐 한국에 나와서 만났을 때 남편이 많이 아파서 고생한다고 들었는데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어요.”
김문경씨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국제전화에 30년도 더 지난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며, 제자의 안부를 소상히 챙기며 염려하는 사람은 우리나라 무용계의 거목 취봉(翠峰) 김백봉 선생이다. 인터뷰 말미에 팔순을 넘긴 노스승은 쉰 살 넘은 제자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스피커 폰으로 스승의 인터뷰를 듣고 있던 김문경씨가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선생님은 대학 입학 실기 시험을 보던 날도 제 춤은 보시지도 않고, ‘너의 춤은 혼이 춤을 추는 것 같다’는 한마디만 하시고 합격시키셨어요. 워낙 유명한 분이라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선생님은 마치 도를 닦는 수도승처럼 맑고 깊은 마음 속의 움직임으로 추는 것이 춤이라 생각하시죠.”
춤을 기교로만 추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살풀이’라면 단순히 춤사위에 드러나는 외형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달래 줄 수 있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내적인 몰입으로, ‘내가 춤이 되고, 춤이 내가 되라’는 일치감의 가르침을 말한다.
생활 속에서 담장을 넘어가는 고양이와 낮잠을 자고 있는 개에게서도 춤의 소재를 찾고 영감을 얻어내는 스승을 보며, 무용가는 무용가를 넘어서 철학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는 김문경씨. 그녀의 학생시절 이름은 김창분이었다.
 
◆ 5세에 춤에 입문… 경희대 무용과 72학번

“어릴 때 저를 찾을 때는 이름을 부르며 찾는 게 아니라 음악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보면 어김없이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음악이 나오면 그렇게 절로 춤이 나왔던 기억입니다.”
다섯 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무용학원을 처음 찾았던 한국무용가 김문경씨. 최승희와 함께 우리나라 무용계 전설로 불리는 취봉 김백봉 선생의 제자로 경희대 무용과 72학번인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무용학과 조교로 후배들을 가르치며 무용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선생님과 한 집에서 살 때 함께 학교를 가면서 꼭 손을 잡으셨어요. 교문이 저만치 보이면 후딱 제 손을 놓으며 ‘얘야 쟤들이 질투해서 널 미워하면 어쩌니’ 하시며 웃으셨어요. 그렇게 엄격하게 공과 사를 구분하셨죠.”
수업 중에도 모든 학생들의 동작을 교정해주고 지도를 하면서도 김씨만 쏙 빼놓고 지나는 일이 흔했다고. 김백봉 선생은 이때 이미 훗날 제자의 불교 입문과 승려로서의 평범하지 않은 미래를 예견했던 듯하다.

◆ 부채춤·화관무·장고 춤 등… 스승의 명무 전수

문정숙, 은방초, 권려성 등 스승 아래서 사사를 받고, 대학에서 김백봉 선생을 만나 혼을 쏟아 붓는 스승의 명무(名舞)를 전수받으며 비로소 그녀의 무용가로서의 삶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김백봉 선생의 춤은 꿈에서 영감을 얻어 처음 창작 이후 우리나라 전통 무용의 대표격으로 자리잡은 부채춤을 비롯해 화관무, 무당 춤, 청명심수, 장고 춤에 이르기까지 모든 춤의 세계가 불교적인 색채를 많이 띠고 있다. 그녀의 춤이 ‘승무’와 ‘무당 춤’으로 자리 잡은 것도 이런 스승의 영향이 컸다. 실제 스승의 춤에서 가장 전수받고 싶어 했던 것도 승무와 무당 춤이었다고 한다.
“승무는 화려하거나 현란한 옷차림과 같은 동원되는 일체의 도구 없이 오직 마음을 열어 느낌만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듯 해 학창시절부터 가장 좋아했어요. 무당 춤은 그 춤 속에 온전히 빠져들어 내가 아닌 ‘혼’이 춤을 추는 것 같은 무아(無我)의 세계로 빠져들죠. 이 춤은 선생님의 주된 작품 속에 빠지지 않는 춤이기도 하고 무용가들에게도 힘든 춤에 속하죠.”
그녀는 한때 마치 재가 부서지듯 춤 사위가 허공에서 사라지는 느낌 때문에 춤을 추고 나면 공허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완벽한 춤은, 보는 관객들의 마음에 영원히 각인되고, 그 감동은 평생 가는 것이라던 스승의 가르침에 그런 굴레를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다.

◆ 딸을 데리고 인도로 출가, 승려로 입문

경희대 한의대 동문인 남편과 결혼, 딸을 두고 있던 그녀의 삶은 무용가로서의 시간을 제외하면 꽤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다.
1980년 미국 ‘South University’ 한의과대학 병원장으로 취임하게 된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우연히 공부하게 된 분야가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83년의 일이었다. 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던 김씨는 이때 그녀 내면을 끊임 없이 괴롭히던 어떤 거대한 힘과 싸우느라 정신적으로 부침이 심했다.
“한의사로 대물림하고 있는 부유한 집안 남자와 결혼해서 딸 낳고 평범하게 살고 있었는데, 말로 설명하기 힘든 어떤 강한 힘이 다른 세계로 몰아가더군요. 그런데 뜻밖에 남편이 먼저 모두 버리고 불교에 귀의할 뜻을 밝혔죠.”
그렇게 부부가 함께 대만 ‘불광산사’로 출가해 승려가 된 것이 1990년. 이후 중국과 인도, 티벳, 일본, 대만을 두루 다니며 불도에 정진하게 된 그녀는 불도의 정진함과 프랑스 한국문화원 초대로 그랑빠레 궁전에서 ‘신과 무용가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공연한 것을 비롯, 솔본느 대학 등 유럽을 돌며 불교를 주제로 한 한국무용으로 포교활동을 해나갔다.

◆ 떼어놓고 출가했던 딸, 2003년도 ‘미스 캐나다’

“평범하지 않은 삶은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지만, 네 살 때 떼어 놓았던 제 딸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어서 가장 미안합니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김씨가 불교에 귀의하며 떼어놓고 떠났던 어린 딸 사라 김은 한국어, 불어, 영어, 일본어, 네팔어까지 능통한 팔방미인으로 아리랑 TV와 KBS TV특공대 등에서 활약하며 2003년에는 미스 캐나다로 출전해 인기상을 받았다. 영국에서 연극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삼성 농구단 통역을 맡은 연예인으로 2004년 2월 6일자 스포츠 조선 연예면을 장식하기도 했던 그 딸은 어머니의 가르침 없이도 반듯하게 자라나 지금은 영국인과 결혼해 이란에서 잘 살고 있다.
현재 김문경씨는 잠시 그녀의 집에 다니러 왔다가 중풍으로 쓰러진 남편을 간호하며, 교민들을 위해 밴쿠버 가정문화원에서 한국 무용 지도를 맡고 있다. 건강이 허락하면 곧 무용교실도 개원할 예정이다.

이재연 기자 jy@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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