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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속살 엿보기] 전쟁과 사랑 'War Bride'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6-11-10 00:00

백발의 '전쟁신부' ...영욕의 세월 60년 뉴브런스윅 '전쟁신부의 해' 올해 지정

1946년 2월 9일,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의 21번 항구에는 모르타니아(Mauretania) 2호가 닻을 내렸다. 추운 겨울밤 영국 리버풀을 떠난 지 나흘 만에 도착한 이 배에는 젊은 여성과 가족 수백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캐나다 땅에 공식적으로 첫발은 디딘 '전쟁신부(War Bride)' 들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 중에도 사랑은 싹을 틔웠고 로맨스는 결혼으로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캐나다 군인과 결혼한 전쟁신부는 1946년 대거 입국했다. 사진 제공 캐나다 사료보관청(National Archives of Canada)
 
'전쟁신부'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캐나다 군인과 결혼한 여성을 일컫는다. 같은 이름의 영화로까지 만들어 진 '전쟁신부'는 캐나다 현대사의 한 단면이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캐나다는 약 50만명의 군인을 영국과 유럽에 파병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 중에도 사랑은 싹을 틔웠고 로맨스는 결혼으로 이어졌다.
 
어떤 군인은 파병 43일만에 결혼했다. 영국병영훈련소는 작은 캐나다로 불릴 정도로 결혼이 줄을 잇자 결혼지침을 따로 마련해야 했다. 군인은 채무 없음을 증명하고 사전결혼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여성은 품행이 방정해야 한다고 정했다. 이후 아내의 캐나다 여행경비를 병사가 부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등 규정이 강화됐다.
 
1945년 종전할 때까지 6년동안 전쟁터에서 결혼한 캐나다 군인은 4만8000여명에 달했다. 일부는 아이까지 낳아 가족은 6만5000여명에 이르렀다. 1946년, 전체가구의 70%가량인 4만5320명이 캐나다에 정착했다. 정부는 시민권을 부여하는 특혜와 선박과 기차를 포함한 모든 교통편을 무료로 제공했다. 이들이 남편과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 대거 도착하자 언론들은 'Operation Daddy'라거나 'Diaper Special'라며 대서 특필했다.
 
전쟁과 사랑으로 맺어진 '전쟁신부'의 후손들은 현재 약 100만명이 가계(家系)를 이루고 있다. 로미오 달라웨(Romeo Dallaire) 상원의원, 캐나다 발레학교의 설립자 베티 올리펀트(Betty Oliphant) 등이 유명 인사다.
 
캐나다 전쟁신부협회(Canadianwarbrides.com)에 따르면 국적별로는 영국출신이 4만4886명으로 가장 많았다. 또, 폴란드(1886명), 벨기에(649명), 프랑스(100명), 이태리(26명), 덴마크(7명) 등 대부분 유럽 출신이었다.
 
뉴브룬스윅주는 캐나다 최초로 올해를 '전쟁신부(War Bride)의 해'로 정하고 이들을 위로했다. 현충일을 앞두고 정부는 지금까지 회로하고 있는 노부부와 가족 350여명을 초청해 기념행사를 열었다. 사랑을 찾아 대서양을 건넌지 60년, 꽃다운 젊은 신부는 백발이 성성했다.
 
이용욱 기자 블로그
http://blog.vanchosun.com/senn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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