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경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엄마의 70세 생신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숫자 70이 머릿속을 맴돌며 마음을 헤집었고,
나는 그 숫자가 주는 특별함을 찾아보려 했다. 칠십은 고희 또는 종심이라고 부른다. 고희란 70세
생일로 사람이 일흔 해를 사는 것은 드문 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 종심이란 나이 칠십이
되면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있단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칠순은 장수를 축하하는 의미보다 살아온 날을 치하하기 위한 감사의 의미가 크다.
숫자 70을 허공에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며칠을 보냈다.
엄마가 어느덧 노년으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하니 괜히 서글퍼졌다. 나는 요즘 거울 속에서 엄마의
얼굴을 보곤 한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엄마를 점점 더 닮아간다. 외모뿐 아니라 말투, 걸음걸이,
습관 등 깜짝 놀랄 만큼 비슷한 점이 많다. 항상 붙어있던 엄마와 나누어져 살아온 지가 벌써 십
년이 다 되었다. 엄마의 예순 살 생신날에도 나는 함께하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엄마의 70세
생신에는 곁에서 마음껏 축하해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고 나는 여전히
엄마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다. 왜 그리 멀리 갔냐고, 보고 싶다고 울먹이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가까이에서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에 대한 가장 큰 불효라는 것을 알았다.
동생과 함께 엄마의 칠순을 어떻게 기념하면 좋을지 의논했다. 내가 있었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크고 작은 집안 경조사를 챙기느라 동생은 부산해 보였다. 유례없는 전염병의 창궐로
일가친척 불러 모아 큰 잔치를 베풀 수는 없다 하더라도 험난한 세월을 견디고 삶의 잔잔한 여운을
이어가고 있는 엄마의 생신을 축하해야 함이 마땅했다. 식당을 예약하고 꽃바구니와 케이크를
주문했다. 많지 않은 용돈도 따로 준비해 전달하기로 했다. 동생 내외는 멀리 있는 나를 대신해
엄마, 아빠를 살뜰하게 챙기고, 만족스러운 고희연을 치렀다.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부모님의 사진
속 모습이 행복해 보여서 나는 안도했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못다 한 생신 축하를 성대하게
치르겠다 약속하며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밤이 되고, 동생이 보낸 사진 한 장을 받아보았다. 엄마가 환갑 때 찍은 사진이었다. 십 년 전
엄마는 지금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젊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엄마를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가 늙고 아픈 게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내가 너무 멀리 와 있어서, 엄마 곁을
지켜주지 못해서 그녀의 노년이 걱정과 그리움으로 얼룩져 있는 것 같아 깊은 회한에 잠겼다.
그리고 사진 아래에 쓰인 짧은 문장이 가슴을 내리눌렀다. ‘언니는 그때도 없었어.’ 나는 돈과
물질로 메울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간극 속에 소중한 삶의 파편들이 흩어져 버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십 년이란 시간 속에서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그간 잊고 살아온 것들이 작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착잡했다. 더 많은 것을 바라며 외면했던 삶의 순간들의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 너머로 엄마의 손을 잡고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가는 내가 보였다. 활기 넘치는
재래시장의 좁은 골목을 누비며 갓 튀겨낸 찹쌀 도넛을 사 먹는 어린 나와, 물 좋은 고등어가
들어왔다는 생선가게 아줌마에게 시선을 돌리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싱싱한 채소와
생선, 과일로 채워진 장바구니 만큼이나 내 마음도 풍성했다. 언제나 옆에서 나를 지켜보는 엄마가
있었기 때문에 내게 주어졌던 모든 날 안온했다.
엄마와 떨어져 산 날 동안 가족 간에서 피고 지는 행복을 놓친 것은 아쉽지만 함께한 추억은
변하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 덕분에 고독한 이방인의 삶에도 온광이 머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엄마 옆에서 웃고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 그날이 오면 엄마와 사진을 많이 찍으리라. 엄마 옆에
바짝 붙어서 엄마처럼 웃으리라. 더 늦기 전에 바라는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엄마의 80세, 90세
생신 사진 속에서는 꼭 내 자리를 찾으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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