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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의 나라로 간다8

김해영 시인 haeyoung55@hotmail.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2-10-10 10:38

물길 따라 금 캐러 간다

-딥 호수에서 배어 룬 호수까지

 이름만큼 긴 호수(Long Lake)가 두르고 있는 녹색이 정말 권태롭다는 생각이 들 즈음 호수 허리가 잘록해진다. 그리고 슬그머니 새 호수에 곁을 내어주는 물목에 걸친 낡은 나무다리. 그 건너편 숲이 딥 호수 캠프사이트(Deep Lake Campsite, 37km 지점)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고무처럼 무감각하던 다리에 날개가 돋친다.

아담한 피크닉 장, 그 위 아웃하우스. 가장 가까운 텐트자리를 봐두고 빨랫감을 들고 물가로 가는데, 아이들이 다람쥐처럼 톡톡 튀어나온다. 어, 베넷 쪽에서 들어왔나? 저렇게 어린 아이들이 패스를 넘어왔을 리 없는데.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숲속을 놀이터 삼아 뛰어노는 아이들 덕분에 산속은 동화 세상이 된다. 아이들은 어른의 희망이다. 그들에게서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본다. 내 어린시절의 꿈을 돌아보고 자꾸만 비척거리는 오늘의 나를 추스려 내일을 세운다.





 오늘 아침은 느긋해도 되련만 팀원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떤다. 칫솔질도 못 했는데 벌써 배낭을 메고 대기 중. 아이구, 오늘은 오전 오후 각기 4.8km씩만 가면 되는데… .’빨리빨리’가 몸에 밴 꿀벌 같으니라고. 그들을 보내버리고 노리작거리며 간다.

 옛 사람들이 해피 캠프부터 시작한 물길을 타고 베넷 호수까지 레이크 트레블(Lake Travel, 모로우, 롱, 딥 호수를 거쳐 베넷 호수, 이후 유콘 강을 따라 다슨 시 까지 800km의 물길)을 했다 하니 나도 선인들처럼 물길 따라 금을 따러 간다. 옛사람들도 고요한 호수에 깃든 산그림자 바라보며 땀을 거두었겠지. 길섶에 초롱 이슬 매단 저 들꽃 눈웃음에  위안을 받았겠지. 물살이 갑자기 거세지는 협곡 전까지 한가롭게 예와 오늘이 오버랩된다.



 물길이 방향을 틀면서 강바닥으로 뚝 떨어진다. 그래서 생기는 폭포, 그 위로 다리처럼 공교로이 매달린 바위에 올라 사진 한 방. 궁금한 건 못 참아 꼭 들여다보고 올라가 보아야 하는 병, 아직 못 고쳤다. 그래서 위태롭기도 하지만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린드맨 호수까지는 죽 내리막길이다. 수목원에 든 듯 늘씬한 나무들이 정렬을 한 숲에 두 쪽짜리 안내판이 서있다. 패스에서 옮겨온 와든 캐빈이 남쪽, 북쪽 양 캠프사이트에 있고 칠쿳 트레일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이 전시된 박물관과 관련 서적을 모아둔 도서관, 그리고 개인 랏지도 있다. 캔버스 박물관에서 칠쿳 트레일 완주 증명서를 자필로 쓴다.

 분홍꽃이 한들거리는 호숫가 경치가 평화롭고 아름답다. 캠프사이트 건너 호숫가에 드니 캐나다 공원 보트가 정박되어 있다. 그리고 건축 중인 랏지도 한 채 보인다. 편의시설과 멋진 경치를 가진 캐나다 쪽 제일 큰 캠프사이트이나 모기와 흑곰이 많다. 점심 먹으러 들어간 쉘터는 모기 사육장 같아 날이 더운데도 벽난로에 불을 피워 모깃불 대신 할 정도.





 점심을 먹고 느긋한 오수에 잠겨 있는데 헬리콥터 한 대가 호수를 날아온다. 상자 몇 개와  레인저를 내려주고 먼지를 일으키며 날아가는 헬기를 보며 야생과 문명의 교차점에 와있음을 실감한다. 그만큼 위험도 줄었다는 안도감. 1년에 두 번 헬기가 들어와 비품들을 보충하고 오물을 실어 간다고. 화장실 휴지를 비치하지 않는 이유를 비로소 이해한다.  야생에서는 야성적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뒤쫓아온 아이들 가족팀에게 자리를 내주고 린드맨 캠프장을 떠난다. 한낮의 햇볕이 대창처럼 따갑다. 멀리 빙하 인 칠쿳 패스를 이젠 아련한 추억으로 그리워한다.

작은 나무다리 건너, 낮은 언덕 넘어, 호수라기보다는 대하(大河) 같은 린드맨 호수를 저 아래로 두고 녹색 들판을 가는데 문득 말소리가 들린다. 어, 캠프사이트인가? 맞다. 무 도사 배추 도사가 들고 다니는 것 같은 지팡이에 ‘배어 룬 호수 캠프장(Bare Loon Lake Campsite, 46.7km 지점, 가장 아름다운 캠프장)’이라 쓰여 있다. 널따란 바위에 새로 짠 큰 평상 두 개가 놓여있고 그 아래 층층이 캠프 패드가 있다.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호수, 가장자리에 수초가 한들거리고 가운데 바위섬에 물새들이 까막까막 졸고 있다. 여름 별장에 온 것처럼 운치있다.

지금까지의 여정이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면 여기는 세속을 벗어난 선경이다. 거친 풍파도 없고 갈등과 대립도 없다. 안온한 평화와 한가한 적요의 호숫가에서 지난 여정의 고단함을 다 부려 놓는다.





이층 텐트 패드에 짐을 푸는 사이 린드맨에서 헤어졌던 대가족팀이 들어선다. 어제는 예사로 보았는데, 애들 등에 커다란 배낭들이 매달려있다. 어, 애들이 패스를 넘어왔나? 그렇단다. 엄마 둘이서 각기 두 아이들(7세 남아 둘, 9세 여아와 남아)을 데리고 6박 7일 트레킹을 왔다고. 지난 2월부터 훈련을 해서 패스도 거뜬하게 넘었다며 자랑이 한참이다. 대단하다. 어른도 망설이는 칠쿳 트레일을 아이들이! 아이들보다도 엄마들이 더 대단한가? 강심장 엄마 슬하에 가문비나무처럼 강건한 아이들이 자라고, 콩알심장 엄마 품에서는 유리병같이 연약한 아이들이 자라기 마련. 이때부터 난 대가족팀의 열혈팬이 되고 만다.

가장 높은 곳에 평상 하나 있어 올라가보니 비상 헬기 착륙장. 송신탑이 서있는 프레이저 산과 칠쿳 산, 그리고 하비 산이 병풍처럼 둘러있다. 그 속에 들어앉아 풍월이나 읊는 시객이 될까, 소맷자락 휘휘 떨치며 떠다니는 풍운이 될까나. 한참 풍정에 젖어 있는데, 정적을 깨는 헬기 소리. 린드맨 호수에 들었던 그 헬기가 여기에도 출동한다. 캠프 패드와 목재를 잔뜩 부려놓더니 오물 든 드럼통을 실어내간다. 목전에서 벌어지는 비행쇼 사진 찍기에 열중해서 텐트가 뒤집어지고 빨래가 다 날아가는지도 몰랐다.




저녁 식사 후 산책 삼아 외로이 떠있는 섬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새들의 차지.  보금자리에 가까이 가자 새 한 마리가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낸다. 그러자 새들이 낮게 섬 주위를 선회한다. 차마 그들의 보금자리를 침범할 수 없어 멀찍이 서서 사진만 찍는데, 그제야 안심한 새들이 제 자리로 돌아간다. 잠시 잔 바람 일던 호수 풍경은 다시 고요한 풍경화로 돌아간다. 나도 널찍한 암반에 왜가리처럼 깃을 접고 눕는다. 그러자 호수도 푸른 눈을 깜박이며 꿈나라로 깃든다.

*린드맨 호수(Lindeman Lake): 41.8km 지점. 제재소와 호텔, 레스토랑과 빵집, 보트 제작자들로 붐볐으며 호숫가에 수 천 동의 천막집이 즐비했다. 여름철에는 작은 증기선과 바지선(Barge Boat)으로 수송하고 겨울에는 얼음길 하이웨이로 베넷 호수까지 갔다. 많게는 4000여 명이 거주했으나 영구 거주가 불가능하여1989년 가을, 모두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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