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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4 29 LA폭동을 아니?

김인종 vine777@gmail.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12-05-05 14:54

“검은 주먹을 존경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 가게를 불태울꺼야  ,  파삭한 잿더미로.    
그다음에  우린 너희에게 말할꺼다.  너희들이 우리 게토를 까만 한국으로 바꿀수는 없지..”

흑인 랩그룹  아이스 큐브의    투팩 샤쿠르가 부른 ‘블랙 코리아 ‘ 다.   1991년 11월 라타샤  할린즈 사건 판결 후에 흑인사회의 분노와 함께 나온  갱스터 랩송이다.  이 노래 에 따라   1992년 4월 29일부터 사흘간   로스엔젤레스의  한인비즈니스   2,200개 업소가 불에 타 잿더미로 내려 앉았다.

4 29 LA폭동이 지난 주에 20주년을 맞았다.  필자는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다.  20년전  그 현장에서 눈물을 뿌리며,  때로는 분노하며,  공포 속에서  취재를 하고 다녔다.   지난주 한인 신문방송에  429 폭동 20주년으로 대서특필된  기사들을 보며 우리 몇몇  늙은 기자들이 모여 앉아 피식  웃었다. 

20년후의 기사에서   4 29폭동을 겪은 기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필자는 당시  로스엔젤레스 프레스 클럽(한인기자협회가  아닌  미국기자협회)이 수여한  1992년 폭동 취재상을 받았었다.  자랑이 아니다 .  이 나무상패를 잊혀지지 않는 상처로 간직하고 있다.  우리 늙은  기자 몇명은  20주년 기사들을  흝어가면서  중얼거렸다.  너희들이 4 29 LA 폭동을 아니?   

지난주 로스엔젤레스에서는 입을 다물고 넘어갔지만 ,  이제 뱅쿠버 친구들에게  나팔을 불어보고 싶다.  1991년 3월16일, 무대는 사우스 센추럴 LA.  흑인 빈민촌.   엉덩이 밑에 까지 내려오는 헐거운 바지와  한여름에도 뒤집어 쓰고 다니는 후드 자켓,  욕지거리 투성이의 흑인 갱 랩스터 문화가 꽃피운 곳이다( 당시 한국 젊은 가수들도  이들을 따라  질질 끌리는 바지를 입고 어설픈 흉내를 내며 인기를 끌었는데  당시 폭동피해 한인들은 그 꼴(?)을 볼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이 사우스 센추럴 LA 에  사는  라타샤 할린즈 라는 15살 흑인소녀가  한인이 운영하는 리커스토어에 들어가 오렌지주스 한병을 훔쳐 나가려 한다.  업주인 두순자씨가 말렸고 덩치가 큰  이 소녀는 두순자씨 얼굴을 몇차례 호되게 가격한 후  땅에 떨어진 오렌지주스 캔을 들어 카운터 에 던졌다.  

라타샤가 막 돌아선 순간 두순자씨가 허겁지겁 들어올린 총이 발사되고 라타샤는 뒷머리에 총격을 받고 현장에서 사망한다.  두씨의 남편은 가게 앞 주차장의 자신의 밴에서 피곤한 몸을 쉬던 중   총격을 듣고 가게 안으로 달려 간다.  두순자씨는 흑인소녀가 어디있냐고 물은 후 실신한다.  죽은  라타샤의 손에는 2달러가  쥐어져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업소내 감시카메라에 녹화됐다.  

그로부터 약 2주후  LA카운티 북쪽  레이크뷰 테라스라는 동네에서  음주운전으로 쫓기던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이 차에서 끌려나와 백인 경찰관  4명에게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는다.   두순자씨 총격사건처럼 이 로드니 킹 구타 사건도  주택가의 한 남자에게 고스란히 녹화된다.  그의 이름은 ‘할리데이’,   그가  사용한 비데오카메라는 ‘소니’.   이 세계적인  비데오로  소니는 다시 한번  그 명성을 올리고  전자제품 소니의 전성시대를 이어갔다.  

1991년 11월15일  LA법정.  라타샤 할린즈를  쏜 두순자씨에게  우발적인  살인 죄로  유죄평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백인 여자판사가  두씨에게 집행유예와   500달러 벌금을 판결하자 흑인사회는 요동하기 시작했다.   4 29 폭동의  빌미는 만들어지고 있었다.

1992년 4월29일.  로드니 킹 구타 사건의  4명 백인경관에게  내려진 평결은  “무죄”.    12명 배심원중  10명 백인,  1명 라티노,  1명이  아시안이었다.   그날  오후 사우스 센추럴  LA의  한 리커스토어에  불길이 치솟았다.   용트림하는 흑인사회의  분노의 신호탄이었다.  이 지역을 지나가던 백인 운전자가 끌어내려져 잔인한 구타를 당했다.  폭동이라기보다  전쟁이 시작됐다.

코리아타운은 북쪽으로 할리우드,  서쪽으로는 웨스트 LA와 베벌리 힐의 백인부촌을  막고 있는 지정학적 요충(?)이었다.   “Let them burn”.  라타샤  사건에서  로드니 킹으로 이어지는  흑인들의 분노를 달랠 완충지가 코리아타운이었다.  “그들을 내버려 두라”.  그래서 코리아타운에는 사흘간 경찰들이 공권력을 놓았다. 

코리아타운의  비즈니스  옥상에는 우지 기관총,  권총, 샷건으로 무장한  한인들이  북진해  오는  폭도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한국에서 훈련받은 향토예비군이 내나라 내민족을 미국 LA에서 지켰다.  중무장   한인청년단이  조직돼  올림픽가를 마지노선으로 바리케이트를 설치했다(웨스턴가는 지켰지만 버몬트는 뚫렸다).  라디오방송에서는 시시각각 공격당하는 한인업소, 병력지원이 필요한 곳, 실탄과 무기가 부족한 곳을 알리면서 물자와 병력공급 조달창구를 했다.   코리아타운 3가의  한인식당 지붕에서는 다가오는 청년단 차량을 적으로 오인해 사격하면서 꽃다운 외아들 한인 청년이 숨지고 또다른 한명이 중상을 입었다. 

필자는 불타는 쇼핑멀에서 한인전자업소로 몰려오는  무장갱들에게  업소 지붕에서 조준사격하는 한인직원 옆에 있었다.  시체들은 건물과 함께 탔다.   미국인과 영어로 싸워서 이기는  동료 최기자는 LA경찰국 본관 엘리베이터 앞에서  2시간을 기다려  당시 대릴 게이츠  경찰국장을  잡아 TV인터뷰를 했다. 

코리아타운을  포기한 게이츠국장을  거세게 몰아붙여  게이츠는 최기자에게 욕을 하면서 자리를 떴다.  이 생생한 인터뷰는 본국 KBS에  특집보도됐다.  취재도중 분노와 억울함에 거리에 앉아  울던 모습이 LA타임즈에 실렸던 라디오코리아 서기자는 후에  기자자리를  박차고  FBI가 됐다.  

라디오서울 김기자는 사우스센추럴 LA에서 취재도중  차를 뺏기고 흑인들에게 납치직전  한 운전자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회사로 들어왔다.  그는 맨발이었다.  전두환대통령  집안과 인연이 됐던 박상아의 어머니는  당시  비데오 가게를 하고 있었다. 

두려움 속에 필자와 인터뷰를 했던  박상아는  중고생이었고  모녀는 상냥한 사람들이었다.  20년이 지났다.  두순자씨의 딸은 전도사가 돼 아름다운 노래을 선사하고 있다.  로드니킹 비데오로 유명한 소니는 삼성에게 자리를 내줬다.  로드니  구타장소 인근에는 한인 대형교회  ANC온누리교회가 섰다.  코리아타운은 잿더미에서  화려한 재기를  하며,  24시간 돌아가는 카페와  식당에는  젊은이들이 넘쳐난다.  흑인들은 아직 이 노래를 한다.

“우리 엄마가 말하기를 무엇을 위해 살지, 무엇을 위해 죽을 지 모르겠거던 ,  주스 한병 때문에  간 라타샤 할린즈 이름을 기억해라”


김인종 밴쿠버조선일보 LA통신원
칼럼니스트:김인종| Email:vine777@gmail.com
  • 라디오 서울, KTAN 보도국장 역임
  • 한국일보 LA미주본사
  • 서울대 농생대 농업교육과 대학원 졸업
  • 서울대 농생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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