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 29일 서울에서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는 참사로 1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이것은 성수대교 붕괴, 충주호 유람선 화재, 아현동 가스 폭발,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 등 최근의 잇단 대형 사고로 불안한 마음을 더욱 참담하게 한 사건이다.
삼풍 참사의 경우 아직 직접적인 원인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런 떼죽음의 비극은 결국 누가 말한 대로 ‘양식(良識)의 죽음’에서 오는 결과라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고질적인 부패, 인명경시현상,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은 외형적으로라도 목적을 이루어놓고 보아야한다는 근시안적 발상 등 건강한 양심을 저버린 데서 비롯된 사고라고 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서울에 가보면, 안전이라는 것은 증발한 듯 한 기분이다. 자동차를 몰아도 너무 아슬아슬하게 몰고, 버스를 타도 간이 서늘할 정도로 곡예를 하면서 운전한다. 99% 안전하다고 생각되고 1%의 위험성이 있다고 해도 결국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해서 그 일을 포기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라는데, 한국의 경우 상당수의 사람들이 99% 위험하고 1%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져도 그 1%에 희망을 걸고 해보는 무모함을 보이는 수가 있다. 설마가 사람 죽이는 경우다.
물론 ‘설마’의 태도를 좋게 볼 수도 있다. 거기엔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면도 있기 때문이다. 설마하니 굶기야 하겠는가? 설마하니 하늘이 무너지기야 하겠는가? 무너져도 설마하니 죽기야 하겠는가? 모두 희망 사항을 붙들고 용기를 얻는 모습이라 보아줄 수 있다.
또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삶이란 있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100%위험이 없는 환경에서 살겠다면 평생 아기 요람에서 나와 보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
다. 현명한 판단 하에 어느 정도 위험이 있더라도 조심하면서 할 일은
해야 한다.
그러나 ‘설마’를 믿는 상당수의 경우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일부러 외면하고, 거기에서 오는 무지를 바탕으로 하는 만용이나 무모함이다. 그야말로 무지하면 용감하다는 말과 같다. 이런 설마는 결국 언젠가는 사람을 죽
이고 만다.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기도를 다시 외우게 된다.
주여, 바꿀 수 없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고,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함을 주시옵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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